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수 (문단 편집) == 출세 == [[진덕여왕]] 때 김춘추가 신라와 당나라 사이 동맹 결성을 위해서 둘째 아들 김인문을 인질로 당에 넘겼었는데, 훗날 이 김인문을 풀어내 돌려보내달라는 의미에서 강수가 쓴 글이 '청방인문서'이다.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가 벌어지고 [[나당전쟁]]이 벌어지자 쳐들어온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가 신라 진영에 보냈던 서신에 대해 답해주는 '답설인귀서'도 강수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태종 무열왕이 즉위한 후 [[당나라]] 사신이 황제의 조서를 전했는데, 조서의 [[한문]] 문장 중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다들 끙끙대고 있었는데 우두는 이것을 보고 명쾌히 설명하고 해석했다.[* 신라는 중국과 거리가 먼 한반도 동남쪽에서 시작했고 중국과 자유롭게 교역을 시작한 것이 6세기 중엽 [[진흥왕]]의 서해안 진출 때부터라, 신라는 중국식 한문 교육의 역사가 삼국 중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도 비교적 짧았다. 중국식 한문에 능통한 인재가 부족했던 배경은 이 때문이고, 8세기가 되면 비로소 신라 문인들의 한학 실력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무열왕은 놀라고 기뻐해서 그의 출신지를 물었는데, 그는 "신은 임나가량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무열왕은 그의 특이한 뒷머리를 보더니 "경의 두골을 보니 '''강수(強首)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강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쇠머리(牛頭)→센(強) 머리(首)→강수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바로 강수는 당 황제에게 보내는 답서를 작성했는데 교묘하면서도 뜻을 다 나타내고 있는 훌륭한 문장이어서 무열왕은 강수를 더욱 높이 평가했고, 존중의 의미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유교적 관점에서는 [[피휘]] 관습에 따라, 이름을 바로 부르는 것은 하대하는 격이고 임생과 같은 표현은 존중의 의미를 나타낸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선생님, 사장님 등으로 부르는 것이 상대를 높이는 뉘앙스를 갖는다.] 임나가량 출신의 [[선생]]이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그리고 강수를 이제서야 뒤늦게 만난 것을 탄식했다고 한다.[* 이미 김춘추가 왕이 된 이후에야 강수와 만난 것인데,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부터 외교관으로서 수십년간 활발히 활동해온 사람이다. 뒤늦은 인생 말년에서야 최고의 명문장가를 찾았으니 이런 표현이 나온 것. 그리고 순전히 강수의 문장력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김춘추가 즉위한 650년대부터 나당동맹이 본격화되었으니, 강수가 국서 작성을 맡기 시작하면서 실제로 외교도 이전보다 신라에 잘 풀리기 시작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렇듯 [[삼국통일전쟁]]기 신라의 중요한 여러 문서들이나 외교 문서는 강수가 전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물에 욕심이 없는 [[청백리]]였는지 자기 생계를 돌보지 않아 집이 가난했는데 그래도 강수는 이를 태연히 여겼다고 한다. 무열왕은 해마다 신성에서 거두는 곡식 1백 섬을 강수에게 주게 했고,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지만 당나라와의 외교를 문장(국서 작성)으로 담당한 강수의 공도 크다'고 하며 강수의 공을 높이 평가하며 사찬의 직위를 주고 녹봉을 높여 매년 곡식 2백 섬을 주도록 녹봉을 올려 주었다. 특히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 황제에게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의 구명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