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수 (문단 편집) == 죽음 == 문무왕을 거쳐 [[신문왕]] 때까지도 활약했는데, 신문왕 때 [[국학]]이 설치된 후 [[설총]]과 함께 유교 경전을 강의했다. 그의 높은 수준의 유학적 소양은 전시에는 주로 외교문서 작성에서 빛이 났지만 이젠 유학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쓰였다. 그러다 신문왕 재위 기간(681년 ~ 69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삼국사기 본기에는 강수가 죽었다는 기사가 없고, 열전에는 그냥 '신문왕 때 죽었다'고만 적혀 있다. 신문왕 재위 말년인 692년에 죽었다는 식으로 몰년이 서술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조선]] [[성종(조선)|성종]] 때에 편찬된 [[삼국사절요]]에서 신문왕 재위 마지막 해인 692년에 강수가 죽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이 그 출처. 다만 [[편년체]] 사서에서 정확한 연대를 모르고 왕대만 알 경우 그 왕의 마지막 해에 그 사건을 넣는 것이 보통이라서 그의 몰년을 692년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어쨌든 신문왕 재위기에 죽은 것은 분명하다. 그가 죽자 신문왕은 나라에서 장례비용을 부담하도록 했고 강수의 집안에 많은 옷가지들과 피륙을 내렸는데, 물욕이 없었던 주인의 습관을 닮았던 것인지 집안 사람들은 이것들을 모두 불사에 바쳤다고 한다.~~주인은 불교는 세속을 벗어난 가르침이라 했는데?~~ 그리고 연애 끝에 결혼한 강수의 아내는 이때까지도 살아 있었는데, 나라에서 내린 물품들을 불사에 바치고 나자 먹을 것이 없어서 고향으로 내려가려 했다. 신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신문왕에게 청했고, 신문왕은 곡식 1백 섬을 내려주도록 조치하려고 했다. 그러자 강수의 아내는 "저는 미천한 몸으로 입고 먹는 것을 지아비에게 의지하다 보니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홀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다시 두터운 대우를 받겠습니까?"라는 말로 사양하며 끝내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가야계 인물 중에서는 꽤나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지만 막상 후손에 관한 기록은 따로 없는데, 자식을 두지 못했거나 귀천상혼의 규범 때문에 6두품이 아닌 평민 신분으로 태어나서 존재감이 말소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철저한 골품제 사회였고, 낮은 신분의 배우자와 결혼해서 태어난 아이는 신분이 낮은 부모 쪽을 따라갔기 때문(일천즉천). 전근대 사회에서 아이가 아예 없는 경우는 드무니, 사실상 후자 쪽일 확률이 더 높다.[* 대장장이가 정확히 몇 두품에 속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단 귀족 계층의 하한선으로 치는 4두품 아래인 것만은 확실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