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영훈 (문단 편집) == 생애 ==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 청룡동(현 동창군 청룡리)에서 아버지 강병헌(姜炳憲)과 어머니 이병희(李炳姬)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6/05/336215/|#]] 청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영변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영변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 유학을 선택, [[히로시마]] 다카다(高田)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1941년 [[만주국]] [[건국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그는 당시 [[최남선]]이 교수로 있는 것을 보고 건국대학 입학을 결심했다.]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인해 1944년 1월 20일부로 [[선양시|봉천]]의 보병학교에 입교, 1945년 초 [[랴오양]]의 예비사관학교에 입교, 수료한 후 그해 7월 견습 사관으로 임관했다가 곧 해방을 맞았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FI2vBQAAQBAJ&pg=PT153&lpg=PT153&dq=%ED%9E%88%EB%A1%9C%EC%8B%9C%EB%A7%88+%EB%8B%A4%EC%B9%B4%EB%8B%A4+%EC%A4%91%ED%95%99%EA%B5%90&source=bl&ots=uTsuYcF2mC&sig=ACfU3U1HhSy6_b6c17NNlW9bd9lo9vay7Q&hl=ko&sa=X&ved=2ahUKEwi88PSPrMfnAhVmyIsBHQpkCrAQ6AEwAXoECAoQAQ#v=onepage&q=%ED%9E%88%EB%A1%9C%EC%8B%9C%EB%A7%88%20%EB%8B%A4%EC%B9%B4%EB%8B%A4%20%EC%A4%91%ED%95%99%EA%B5%90&f=false|#]] [[8.15 광복]] 직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귀국을 기다렸고 10월이 되어서야 고향 창성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월남하여 1946년 3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졸업했다.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장을 지냈다. [[6.25 전쟁]] 때는 국방부 관리국 국장, 제3군단 부군단장을 지냈다.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 [[파일:강영훈 총리.jpg]] 이후 사단장을 거쳐 196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제6군단]]장 시절 [[4.19 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중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내려졌으나 강 전 총리는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제15대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는 반대하였다. 당시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다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대문 형무소|서울형무소]]에 100여 일간 수감되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강영훈은 졸업생 자격으로 육사에 들어와서 생도들을 자기 임의대로 끌고 나와서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시키려고 했던 [[전두환]] [[대위]]를 저지했는데 이에 전두환 대위는 이걸 [[박정희]] [[소장(계급)|소장]]에게 [[고자질]]했다. 이에 분노한 박정희 소장은 강영훈 중장을 전술한 바와 같이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해버렸다. 이후 군정 치하에서 반혁명죄로 숙청된 [[이한림]], [[장도영]], [[김웅수]] 등과 군부의 권유를 받아 미국 각 지역에 뿔뿔히 유학을 떠난다.1962년 [[뉴멕시코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이듬해인 1963년 [[USC]]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70년부터 [[박정희]] 정권을 용납하게 된다. 그러나 후에도 계속 밝혔듯이 "5.16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란 것은 그의 평생의 신념이었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당초에는 [[국민대학교]] 학장직을 제의받고 왔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다음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년 후 외무부 산하의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0년 11월 3일, 주영대사에 임명되었다. 12월 9일, 영국 정부가 아그레망을 접수함에 따라 1981년 2월 25일에 부임하여 [[엘리자베스 2세]]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1983년 10월 4일, 대한민국과 아일랜드가 수교함에 따라 12월 22일부터 아일랜드 대사를 겸하였으며, 4월 11일, 아일랜드 대통령 패트릭 힐러리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1984년 12월에 귀국, 후임 대사로는 김영주가 부임하였으며 강영훈은 이후 주 [[교황청|로마 교황청]] 대사, 외무부 본부 대사를 지냈다.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강영훈 의원에게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을 제시했고 강원용 목사를 총리로 내정하려고 후보에 올려두었으나 특정 종교의 성직자를 임명하기엔 무리가 있었던데다가 강영훈 의원이 초선에 당대표를 하기엔 무리라고 고사하면서 무산되었다. 같은 날 저녁, 다시 강영훈 의원에게 총리직을 제안했고 그는 고심끝에 이를 수락한다.]첫 남북총리회담과 [[남북기본합의서]] 등 국무총리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후술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