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영훈 (문단 편집) === 총리 시절 ===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최고의 총리로 꼽기도 했다. 이 책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사람’으로 강영훈 전 총리를 꼽았으며, 여러 인터뷰에서도 역대 총리 가운데 제대로 권한을 행사해서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한 총리로 평가했다. [[정두언]]의 증언에 의하면, 사표를 책상안에 넣어놓고 일을 했었다고 한다. 재임 중에 3번이나 [[사표]]를 냈었다고. [[이상돈(1951)|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역시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의 행동반경은 크지 못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가 강영훈 총리와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중용해서 북방외교를 트고 변화하는 대외통상환경에 대응해서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국무총리 시절 그는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 를 가졌다. [[1989년]] [[일본]]의 [[쇼와 덴노]]의 장례식에 조문을 하러 갔던 적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P1Q3_ttDyk|#(1:34:53)]]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512_326_11.jpg]] 특히 1990년 9월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켜서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3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협력 증진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당 사진은 강영훈 국무총리가 1990년 12월 11일 저녁 제3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을 위해 쉐라톤 호텔에서 베푼 만찬회장에서 북한 [[연형묵]] 총리와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있는 사진이다. [[파일:/image/001/2016/05/10/PYH2016051010610001300_P2_99_20160510155811.jpg]] 1990년 10월 18일 남북총리 회담차 [[평양시|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한 장면. 뒤에 서있는 사람이 북한 연형묵 총리이다. 이 당시 국민 감정과 상호 존중을 모두 고려하여 '주석님'이라는 가벼운 존칭으로 부르려 했으나[* 당시에는 언론에서 김일성을 호칭할 때 그냥 이름만 부르는게 일반적이었고, 굳이 직무를 붙인다고 해도 '북한 주석 김일성은' 이런 식으로만 호칭할뿐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쓰지 않았던 것. 그런데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대면하는 이상 직무를 붙여서 호칭하는건 당연지사였고, 여기에 더해 '주석'이라고만 부르기도 뭣하니 최소한의 예의를 차려서 '님'을 붙이기로 했던 것.] 김일성이 인사말 도중 '''강영훈 총리 각하'''라는 더 높은 존칭으로 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주석 각하'''로 격상시켜 호칭했다고.[* 이 때 김일성은 남북 대화에 상당한 공을 들였으며 심지어는 [[김달현(1941)|김달현]] 부총리를 비롯한 일부 온건파가 '''자본주의 도입'''을 건의하자 일단 들어보자며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 정도로 자신이 공들인 남북 대화 덕분에 '''대한민국의 2인자나 다름없는 국무총리'''를 만났으니 각하라는 호칭까지 쓴건 어찌보면 그렇게 놀라울 일도 아닌 것.] 이 부분은 신문 지상에서 대거 보도되었으나 방송을 통해서는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98695|KBS 뉴스 9]]에서만 보도되었고 [[https://imnews.imbc.com/replay/1990/nwdesk/article/1839963_30435.html|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 부분이 생략되었는데,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사진'''으로조차 국내 언론에 나올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TV에 김일성의 실제 모습과 육성이 나온 것 자체만으로도 전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으며, 당연히 강영훈 총리가 주석 '''각하'''라고 부르는걸 그대로 내보내는게 어찌보면 시기상조였던 셈. 물론 당시의 KBS가 사실상 정부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하는 국영방송이었음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정도의 해프닝은 정부가 얼마든지 받아들일 정도로 남북 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또한 면담 도중 김일성이 “우리 민족이 6000만”이라고 하자 “6000만이 아니고 7000만 명입니다”고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고. 다만 당시 김일성의 나이가 '''78세'''로 팔순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 정도의 착각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또한 북측에서 강영훈 총리의 여동생을 찾아 만나게 해주었는데 동생은 계속 울먹이는 소리로 “위대한 수령님 밑에서 잘 살고 있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고 하며 북측에서 이를 언론에 흘리며 곤욕을 치뤘다. 국무총리에서 퇴임하고 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된 이후 7년간 민간의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했다. 또 북한 수재민 돕기(1995년) 등 대북 인도적 지원,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성수대교 붕괴사고]](1994년),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 등 대형 재난 발생시 긴급구호 활동도 전개했다. 이어 사할린 거주 해외 동포 영주 귀국 사업 등 인도주의 발전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겼다. 대한적십자사 총재 역임시절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총재였다는 후문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