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최후: 성도의 난 (264년) === 촉 멸망 이후 딴 마음을 먹은 [[종회]]는 강유를 열렬히 환영하며 강유의 수레와 깃발 등을 돌려주고 항상 함께 다니며 강유에게 의견을 물었다.[* 재밌는 것은 이때 종회가 강유를 [[제갈탄]], 하후현과 비교하며 강유를 띄워주는데 저 둘이 모두 사마씨에게 대적하다 사망한 걸 보면 종회가 애초에 반란의 뜻을 품고 의도적으로 저 둘을 언급했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종회는 이들 둘보다 강유가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 위의 입장에서 이미 한 번 위를 배신한 강유가 위를 다시 배신하진 않을 거라는 식으로 쉴드를 쳐주었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종회가 정말로 정촉(征蜀) 이전부터 반란의 의도를 품었다면 자신의 반란 의도를 비유로 쉽게 드러내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앞서[[검각]]에서 보낸 편지도 그렇고 간보의 진기에 따르면 종회가 강유에게 항복을 받을때 "왜 이리 늦은 거요?”라고 말하자 강유가 정색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 사람을 오늘 보는 것만도 빠른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종회가 그를 매우 높게 여겼다는 기록을 보면 종회는 강유에게 상당한 호감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이후 정사나 정사에 [[배송지]] 주석으로 적힌 한진춘추, 화양국지와 소설인 연의 둘 다 끝내는 종회를 이용하여 촉한을 부흥시키려 했고 종회가 일으킨 반란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우선 한진춘추에 따르면 강유는 종회에게 딴 마음이 있음을 알아채고 촉나라 부흥에 이용할 목적으로 종회를 회유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에 바람을 더 넣었다. >"듣건대 군께서는 회남에서부터 그 계책에 허점이 없었다고 합니다. [[서진|진나라]]가 창대해진 것은 모두 그 덕택입니다. 이렇게 촉나라까지 정복하여 그 위엄과 덕망이 [[세상]]에 진동하니 백성들은 그 공을 존경하고 군주도 그 지모를 두려워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이대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한신]]은 [[한나라]]를 배반하지 않았어도 천하가 평정되자 의심을 받았으며 [[문종]]은 [[범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가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이해관계가 그런 겁니다. 군께선 이미 엄청난 공과 덕을 이루셨으니 도주공(陶朱公=범려)이 [[선박|배]]를 띄워 [[월나라|월]][[왕]] [[구천]]을 떠난 것을 본받아야지 않겠습니까? 공훈과 몸을 보전하려면 [[아미파|아미산]](峨嵋山)에 올라 [[장량(전한)|장량]]처럼 [[신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야지 않겠습니까?" > >종회가 말했다. >"그대의 말이 심오하여 내가 능히 행할 수 없소. 또한 지금을 위한 방도로 혹 아직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소." > >강유가 말했다, > >"그 [[반란|나머지 방도]]야 그대의 지력으로 능히 헤아릴 수 있으니 이 늙은이(老夫)가 번거로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강유전 주석 한진춘추 [[264년]] 정월, 종회는 강유의 본심도 모르고 등애를 참소하였고 강유의 계획에 방해가 될 등애는 [[체포]]되어 중앙으로 압송되었다. 이로인해 종회는 강유 등을 거느리고 성도(成都)로 가서 익주목(益州牧)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고는 강유에게 군사 5만 명을 주어 그를 선봉으로 삼으려 하였다.(강유전) 한편, 등애가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는 얘기를 듣고 종회도 믿을 인간이 못되는 걸 아는 [[사마소]]는 촉 지방의 정세가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병사 10만을 [[시안시|장안]]으로 보내 대비하게 했다. 사서 기록들을 종합한 [[자치통감]]을 보면 강유를 비롯한 촉장들은 종회로부터 옛 촉한군의 인호절개(지휘권한)을 돌려받았고 마침내 264년 정월 15일에 종회가 곽태후의 유명을 날조해 사마소 토벌을 천명하고 위장들을 모조리 가둔후 자신이 아랫사람에게 의논을 끝내게 한 뒤 목판에 쓴 증서로 관직을 임명하였으며, 또 신임하는 사람들을 파견하여 각 군대를 대신 관리하도록 하여 촉을 장악하는 난을 일으킨다. 강유의 계획은 이후 '밖에 있던 병력들[* 아마도 촉병들이나 강유, 종회의 심복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산장으로 삼은 다음 수천개의 곤[* 단단한 나무를 잘 다듬어 만든 타격무기를 말한다. 원문에서는 백부(白棓)라고 불리는데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무를 다듬기만 한 상태의 곤봉을 백부(白棓)라고 불렀다. 이는 백봉(白棒)과 동의어로 한글역 정사 삼국지에선 즉 '하얀몽둥이'로 번역하는데 백봉은 곤의 다른 이름이다.]등의 무기로 차례대로 위장들을 살해해 미리 파놓은 큰 구덩이로 던진다'는 종회가 짠 계획을 이용, 마침내는 종회도 죽이고 위나라 장수들과 병사들도 이런식으로 다 제거한 다음 유선을 복위시킬 계획이었던 걸로 보인다. >維教會誅北來諸將 旣死 徐欲(己因)殺會 盡坑魏兵 還復蜀(漢)祚 密書與後(漢)主曰 > >강유는 종회를 교사하여 북쪽에서 온 여러 장수들을 주살하도록 하고, 뒤이어(이로인해) 종회를 죽인 후 위나라 병사들을 죄다 파묻어 버려 촉(한)을 다시 부흥시키고자 했다. 후(한)주에게 밀서를 보내어 이렇게 고하였다. >---- >강유전 주석 화양국지,자치통감 자치통감과 강유전 주석 화양국지에 따르면 강유는 종회에게 먼저 위나라 장수들을 죽이도록 가르쳤고, 이를 통하여 종회를 죽인 후 위나라 병사들을 다 파묻어버리고 촉한을 부흥시킬 것을 계획했다고 한다. 강유가 외부의 병사들을 다 불러 동원하고 수천개의 많은 무기를 준비했다는것은 강유가 촉병 등을 동원하여 위나라 장수들 뿐만 아니라 종회의 측근들과 상관들을 잃고 혼란에 빠진 위나라 군졸들까지 한꺼번에 기습해 도모하려 했다는 증좌가 된다. 게다가 강유는 촉의 병력을 동원,지휘할 수 있는 인호절개를 종회로부터 되돌려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종회가 강유에게 줄 5만의 병력은 구 촉한군일 가능성이 높고 지휘관들이 다수 죽어 혼란에 빠진 위군을 공격해 섬멸하려 했을 공산이 크다. 이것이 배송지가 언급한 촉을 회복하는 계책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채 종회는 위장들을 다 주살하라고 한 강유의 말을 따르고자 했지만 미적거리면서 결단하지 못했다. 그 사이 갇혀있던 [[호열]]이 종회의 신임을 받던 [[구건]]을 통해 이 계획이 담긴 밀서를 그의 아들 [[호연]]에게 몰래 전했고 이 사실이 하룻밤 사이에 위군 전체에 전달된다. 18일, 호연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출진하자 남아 있던 위나라 장졸들이 지휘하는 자가 없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출진해 (자신들을 죽이려던 강유와 종회를 죽이러) 성도로 너나없이 몰려들었고 마침 무기를 배분하던 중인 종회와 강유를 습격하였다.[* 재미중국인 사학자 리둥팡 교수는 이 기록에 의문을 품고 호열이 자기가 살기 위해 위나라 장수를 다 죽이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한 것으로 보았다. 즉, 종회는 강유에게 5만명의 병사를 줄 생각만 하고 있었지 위나라 병사들과 장군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강유가 병사들을 다 죽이려 했다는 화양국지의 기록도 이 과정에서 확대 재생산된 유언비어가 사서에 적힌것으로 보았으며 강유가 병사들을 다 파묻으려 했다고 해도 위나라 병사들이 저항했을 것인데 어떻게 가능했겠느냐 라며 이 기록에 의문을 품었다.] 당시 종회와 강유는 휘하 병사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고 있었는데 위군이 몰려들자 강유는 종회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저항했다. 당시 62세[* 최소한 국내의 일부 연의 평역본에는 58세라고 되어 있는데, 62세가 정확히 맞다. 이 때는 264년이고, 강유는 202년 생이다.]였던 그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종회의 말에 "오직 마땅히 공격할 뿐이오!"라 말한 뒤 몰려든 병사들을 상대하여 '''[[인간흉기#s-1|직접 대여섯 명을 죽이며]] [[노익장|분전했고]]'''[* 조운과의 일기토는 연의 창작이지만, 그걸 제하고 논하더라도 강유 개인의 무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60대 초중반의 나이에 [[무쌍|적병을 하나도 아니고 여럿을 손수 썰어 넘겼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무력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라는 반증. 당장 평생 전쟁터를 전전하던 유비는 63에 세상을 떠났고,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던 손권은 60대에 오락가락하며 이궁의 변이나 일으켰다. 그에 비해 강유의 이 일화는 그야말로 [[진삼국무쌍 시리즈]] 실사판을 방불케 하는 비장미 넘치는 일화인데, 오히려 연의에서 이 일화가 삭제돼서 강유가 단순히 자결하는 걸로 처리됐다. 다만 연의에서는 강유가 죽기 전에 두 차례 심병(심장 발작)이 일어났다는 묘사를 넣었다. 반란 계획을 논의하고 나오는데 첫 번째 발작이 일어나 실신하고(마치 실패를 암시하는 복선 같기도 하다), 이후 계획이 실패하고 위군을 상대하는데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나자 더 싸울 수가 없게 되어 자결한다는 묘사. [[삼국연의(1994)|84부작 삼국지]]는 두 서술을 모두 혼합했는지, 강유가 위군에게 포위당한 채로 분전하다가 심장 발작이 일어나 더 싸우지 못하고 자결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권중달 역 자치통감에서 "강유는 종회의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싸웠는데 손으로 5~6명을 죽이니"라는 대목 중 '손으로' 부분이 오역되었다. 원문에서의 수살(手殺)이란 표현은 맨손으로 주먹질을 했다는 게 아니라, '직접' '손수'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관용적으로 쓰는 '이 손으로 ㅇㅇ했다'는 표현이 정말로 '맨손으로 그 행위를 하였다'는 의미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직접 그 행위를 하였다'는 의미를 담은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 사이 종회는 병사를 파견하여 붙잡혀 있는 아문과 군수를 죽이도록 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물을 들어 문을 부수고, 사병들은 대문을 부수었으므로 격파할 수 없었다. 곧 성문 밖에서는 사다리에 의지하여 성이 어지럽게 진입하였고, 쏘아대는 화살은 비오듯 했으며, 아문과 군수들은 각기 흩어져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서 그들의 부하 병사들과 합류했다. 결국 강유는 병사들과 결투 끝에 살해되고 종회도 더불어 살해된다. 강유의 시신은 죽은 뒤 쓸개가 꺼내어져 그 크기가 되(升)[* 이에 대해선 강유가 담낭수종을 앓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담낭수종이란 담낭이 맑은 액체와 점액으로 가득차는 것으로 크게는 사람 머리만한 것도 있다고 한다. 그 정도면 한 되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될 정도라는 기록이 남겨질 정도로 위군에 의해 참혹하게 훼손되었다. 그 밖에 역시 정사에 주석으로 달린 파촉 지방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는 [[화양국지]]와 이를 인용한 [[자치통감]]에는 강유가 [[유선(삼국지)|유선]]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도 전해지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강유는 그 난장판인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촉한의 부흥을 꾀했던 걸로 보인다. >願陛下忍數日之辱,臣欲使社稷危而復安,日月幽而復明。 >'''폐하께서는 며칠만 고생을 참아 주십시오. 신이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세워서 어두워진 일월(日月)이 다시 빛나도록 하겠습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