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강유가 촉한에 남았던 이유 == 앞서 말했듯 강유는 위로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촉에 남는다. 정사의 서서전이나 정욱전에서 보듯 당대에는 가족의 요청이라면 적국에 있던 자라도 넘어 오는 것이 상례였다. 그럼에도 강유는 거절하고 촉에 남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원래의 소속 국가였던) 위나라를 공격하는 북벌에 가장 적극적인 촉한의 인물이었고 마지막까지 촉을 부흥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기까지 한다. 촉 입장에서는 충신이겠지만 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으뜸가는 역적이다. 당대의 풍습과 어긋나게 강유가 왜 촉에 남아 일생을 촉을 위해 충성을 바쳤는지 당대에 강유가 자신의 행동을 시원스럽게 설명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 강유가 자신을 위가 아닌 한의 신하로 생각했을 가능성 * 신빙성이 낮다. 이 주장은 제갈량이 강유가 투항한 직후 장예와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 강유를 칭찬할 때 '한실(漢室)에 마음을 두고 있고'라는 말을 한 것이 최대의 근거이다. 그러나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마준에게 촉군을 막기 위해 기현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마준을 따라 상규로 들어가려 했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신빙성이 낮다. 처음부터 자신을 한의 신하로 생각했다면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전황은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패하기 전까지 촉군에 유리했으므로 가족들을 데리고 촉군에 투항했어야 앞뒤가 맞다. 제갈량의 편지에서의 내용은 그냥 강유가 능력은 뛰어난데 항장 출신이라는 이유로 중용되지 못하면 촉에 손해니까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근거없는 미사여구를 덧붙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 * 제갈량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 + 강유 개인의 공명심 * 위에 있는 '강유의 귀순 과정 재구성'을 살펴보면 강유는 상당히 억울하게 위나라와 고향인 기현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강유의 아버지는 위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으므로 강유는 오늘날로 따지면 국가유공자 집안의 사람이며, 강유 본인도 어떻게든 위나라에 충성해보려고 '기현으로 돌아가셔야 한다.' 고 상관인 마준에게 진언도 하고 상규로도 따라가보려 했다. 그럼에도 내쳐진 상황이다. 그에 비해 제갈량은 그야말로 강유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며 기대를 걸었다. 제갈량의 강유에 대한 기대는 예사로운 수준이 아니다. 실제 강유의 촉한에서의 강유의 관직생활을 정리하면 27세에 창조연/봉의장군에 봉해지고 당양정후가 더해지고 29세에 정서장군 행후호군으로 봉해진다. 36세엔 대사마 장완에 따라 사마로 봉해지고 41세에 진서대장군+영(領)양주자사로 봉해졌다. 45세엔 위장군을 달고 비의와 더불어 녹상서사를 역임했으며 51세엔 독중외군사, 54세엔 마침내 대장군으로까지 임명된다. 강유전의 기록들을 참고할 시에는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데 항장으로선 매우 순조로운 출세가도라고 볼 수 있다. 투항하자마자 제갈량과 더불어 유비의 고명대신인 이엄이 맡았던 봉의장군이 되게 하였고, 위나라에서 하던 일과 비슷한 업무를 맡겨 촉에 적응하도록 배려하였으며, 다름아닌 그 조운과 [[장비]]가 활약하던 지역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당양의 정후로 봉해지지 않나, 29살의 젊은이를 정서장군으로 봉했는데 예주 시절부터 종군한 베테랑이자 [[조운]]에 버금가는 명성을 갖고 있다던 [[진도(삼국지)|진도]]가 최종적으로 오른 관직이 정서장군이다. 항장을 곧바로 정서장군으로 꽂은 셈이다. 단적으로 고평릉 사변 이후 사마씨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사마소]]가 임시 정서장군에 오른게 40대 이후다. 물론 관직체계가 촉과 위와 다르다보니 1:1에 비교할 수 없지만 강유가 어마어마하게 일찍 출세했다고 볼 수 있다. 강유 자체도 군사적으로 장완과 비의를 이은 3인자 정도의 포지션에 꾸준히 임했다. 계한보신찬을 참고할 시에는 기록이 부족한 촉한의 거물들이 여럿 수록되어 있는데 인재가 아무리 부족하다고한들 장완과 비의를 이은 3인자 포지션을 어린 항장이 꿰찼다는 것은 단순히 인재부족으로 설명할 수 없다. 5차 북벌에서 강유는 승상+녹상서사+익주목 제갈량과 지휘부에서 사마의의 견벽수비 전략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거기에 주위 사람들, 특히 다름 아닌 최측근인 장완과 장예에게 '마량이나 이소도 강유에게 못 미친다.'[* 마량은 긴 설명 안해도 백미(白眉)로 유명한데다가 나름 유비군에서 큰 역할을 한 공신이였고, 이소는 이씨삼룡(李氏三龍)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촉한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다.] '능력이 뛰어나고 근면하다.' '황제를 뵙게 해야 한다.' '중앙군 5~6천명을 맡겨야 한다.' 며 중용할 뜻을 밝혔다. 장예는 승상부에서 승상의 보좌관 최고 지위인 유부장사였고 장완의 경우에는 제갈량의 후계자로 익히 알려진 인물로 친형 [[제갈근]] 정도를 제외한다면 제갈량과 가장 많이 서신을 교환한 인물이다. 이들은 제갈량의 확고한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들로 볼 수 있는데 다름 아닌 그런 인물들에게 강유를 잘 봐달라고 한 것이다. 괜히 장완이 후일 강유의 군사적 재능을 신뢰해 그를 전폭지원하고 자신은 그를 뒷받침하겠다고 계책을 짠게 아니다. 강유가 먼 훗날 제갈량의 제자로 인식된데 있어선 이러한 승진가도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오장원에서 제갈량은 만약에 위연이 후미를 맡지 않는다면 강유에게 퇴각에서 가장 중요한 후미를 맡도록 명하고 강유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이와 더불어 제갈량 휘하에 이뤄진 출세가도에 제갈량 사후 강유가 실제로 군사 전문가로써 장완과 비의를 보좌하는 역을 맡았던데다가 항장에 낙하산인데도 이에 대한 반발이 아예 없었다는 점에서 '강유는 제갈량의 후계자이되 제갈량의 군사적 방면을 이어받은 후계자'로 인식해도 정사의 기록과 어느정도 부합한다. 진수만해도 강유를 장완과 비의와 같은 전에 함께 엮은 바이기도 하다. 갈 곳 없는 항장 출신이었던 강유에게는 그야말로 제갈량의 후한 대우는 뼈에 새길 만한 은혜였으며, 나아가서는 위나라에 있었을때와는 차원이 다른 승진가도에 공명을 추구하던 그의 성향이 잘 맞기도 했을것이다. 원래 강유는 공명(功名,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림)에 뜻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버린 위로 돌아가는 것보다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았는데 자신을 높이 대우해주는 촉에 남는 것이 입신양명에 유리하다는 생각도 한 몫 했을 수도 있다. [[후한]] 시기부터 한나라 중앙정부에서 강유 같은 관서 출신 인물들은 그다지 크게 출세하기 힘들었다. 옛 [[전한]]의 중심지였던 관중, 관서 지역은 [[광무제]]의 광무중흥 이래로 광무제의 근거지인 남양군에서 가까운 [[낙양]]으로 수도가 옮겨진 이후엔 200여년 가까이 재건되지 못하고 사실상 방치된 상황이었기에 여러모로 소외된 위치에 있었고, [[강족]]의 침입이 잦은데도 중앙정부가 마땅한 대처를 못해서 독립적인 세력이 창궐하던 지역이라 위나라가 들어서고도 대우가 좋다고 할 순 없었다. 강유가 투항한 제갈량의 1차 북벌에 호응한 농서 3군도 이런 배경하에 있었던 것이다. 즉 강유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당귀]]를 받았을 때, 위에서 설명했듯 당시의 관습대로 위나라로 돌아가버리면 그만이긴 했지만 이전부터 중앙정부에 소외받던 지방 출신으로 적성국인 촉에 항복한 경력이 위에서 좋게 받아들여진 않았을 것이고 돌아간다고 자기나 가족들이 처벌을 받지 말란 법도 없었다. 반대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촉이 북벌을 해서 농서를 손에 넣으면 강유는 촉의 고관으로써 금의환양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명에 큰 마음을 가졌던 강유 입장에선 제갈량의 후대는 일종의 기회였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