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평가 == 강유에게는 낙곡 전투를 참전한 것은 물론이고 246년의 곽회, 하후패 격파, 이를 압도하는 도서 전투의 공로가 있었으나 호제와의 연계가 실패한 단곡에서의 패배가 오점이 되었다. 전술적으로는 위나라 상대로 크게 이긴적도 있고 크게 진적도 있는데, 어쨌거나 위나라에서도 서부 방어를 위협하는 위협적인 인물이었음은 사실이다. 흥세 전투는 방어전에 왕평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소수군으로 험지에서 적의 발목을 붙잡는 데에 있지 이를 실질적으로 섬멸한 것은 비의의 본대였고, 왕평의 역할이 작은 것이 아니지만 왕평이 모루 역할을 했다면 비의는 더불어 망치 역할과 퇴로 차단의 역할을 충실히 했는데, 그의 공로는 잘 언급되지 않는 면이 있다. 255년의 도서 전투의 경우에는 공격전에서 왕경의 수만 군을 통째로 섬멸시킨 전투로 강유 자체가 총사령관으로 출전한 경우이기에 비의와 그 공을 갈라먹어야 하는 흥세 전투의 왕평보다 지분이 훨씬 높다. 강유의 실질적인 전술적인 패배로 유추되는 것은 256년의 단곡 전투와 262년의 후화 전투인데 둘다 이전의 공적을 가릴 정도의 패배였다. 나머지 역시 지속적인 소모전, 잠시 맞붙은 다음 성과를 얻지 못하면 후퇴하는 경우,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두되 전략적으로 소득을 얻지 못한 전투들이었다. 당대에 그 나름대로 성과도 올렸으나 제갈량을 계승한 북벌정책과 대패 때문에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이런 북벌에서의 지속적인 실패는 촉한 멸망 당시 촉의 재정상태가 훌륭했던것을 미루어 보아 국력의 소모보다는 나라의 전쟁피로도를 야기했고, 이것이 내부에서의 강유에 대한 비판점이 되었다. 삼국연의 같은 로망스 문학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역사적 인물로써 강유의 전략 + 정략 능력은 이전부터 꾸준히 저평가를 받아왔다. 적국인 위나라와 비교하면 항상 국력, 군사적으로 열세적인 위치였고 항장이면서 군부의 1인자라는 자리는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고 아예 숙청 1위 대상이었다. 강유는 이런 위치에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끊임없이 위를 공격해서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그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또한 그의 한중방어전략은 분명 효율적인 전략이였으나 당시 촉한 정계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였음을 간과하는 부분이 있어 이것이 강유의 실책이라고 홍대용은 평가하었다. 강유는 조위의 군사력에 만 단위의 피해를 입힌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가 모든 면에서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위를 물고 늘어지며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은 칭찬할만하나, 그것이 촉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거대한 성과는 아니었고, 전략적 식견과 정략적인 부분에 있어 끊임없이 약점을 노출하며 이는 본인과 나라에 큰 화가 되었다. 따라서 강유는 열세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위를 상대로 선전한 명장이자 멸망 이후에도 흥한을 꾀하다 죽은 촉한의 마지막 충신이었지만 정계에서는 많은 약점을 노출한 한계도 분명한 사람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