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현대의 평가 ===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에 있어서 역사적 인물 강유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까지 좋은편은 아니다.일단 [[근성]]가이였다는 것과 촉에 대한 충성심이 진짜였다는건 누구나 인정한다. 단 '''국력이 약한 촉한을 말아먹은 [[전쟁광]]'''부터 팬들의 주장인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이자 유일한 희망'''까지 행적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일단 촉한의 존립 명분은 촉한이 정통이고 조위는 역적이니 토벌해야 한다는 [[촉한정통론]]이며 그때문에 선제인 유비 시절부터 조조(위)와 치열하게 대립해 왔으며 등지와 손권의 대화에서 알수있듯 궁극적으론 오도 토벌 대상이긴 했고 [[형주 공방전]] [[흥세 전투]]등의 경우에서 알수있듯 촉한이 가만있는다고 오나 위가 가만 있을리는 절대 없었고, 국력이 약한 촉으로써는 국가 대전략이 '위나 오가 안정화되기 전에 영혼의 한타를 통한 일발역전을 노린다'외에는 가능한 방법이 없으므로 북벌을 하기는 해야 했다. 실제로 [[장완]] [[비의]] 등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북벌을 하려고 하긴 했으므로 이러한 인식은 촉한 내부에서 널리 공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항장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북벌 과정이 제갈량만큼 매끄럽지는 못해서 여기저기서 말이 터져나온것. 강유까들은 주로 다음과 같이 강유를 비판했다. *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했다. 미약한 국력과 내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제갈량]]보다도 더 많이 나아간 무리한 북벌(7차례)탓에 촉은 급속히 피폐해졌다. 제갈량 시절에는 적어도 백성들이 북벌 때문에 피곤하고 지쳤다는 말은 없었는데 강유의 북벌 때는 [[초주]]가 잦은 북벌로 인해 백성들이 고뇌하고 힘들어 하자 구국론을 지었고, 오나라의 승상이었던 [[장제(손오 승상)|장제]]는 촉한이 망할 시점에 촉한이 환관이 전횡하고 잦은 군사활동으로 백성들은 피곤하고 병사들은 지쳤다며 비판했다. 초주뿐만 아니라 [[제갈첨]], [[동궐]], [[번건]] 촉 중신 3인방의 연달은 강유의 5차례 북벌 후 대장군에서 익주자사로 교체 시도, 이전부터 강유의 북벌을 비판한 장익은 물론 262년 후화전투에 출정하는 강유를 보고 비판하는 요화까지. 촉 조정 전체에서 비판을 들은 점은 깊게 생각할 만한 부분이다. * 한 나라의 수장이 되기에는 정치력이 부족했다. 강유는 환관 황호의 발호를 누르기는커녕 오히려 참소를 당해 곤경에 처했다. * 강유는 전략적 식견이 부족했다. 애초에 유비는 한중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방어전략을 수립했고, 이후 [[위연]]-[[오의]]-[[왕평]]이 완성시킨 제법 튼실했던 한중 방어라인을 적군을 한중으로 유인해 격멸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는 촉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능력도 없으면서 호전성만 높았던 그로 인해 촉의 멸망이 재촉됐으니 강유는 망국의 충신이 아니라 나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망국의 원흉이었다. 이처럼 강유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연의만 보고 강유를 평가한 부분으로 정사를 보면 최소한 첫번째 비판점에서 만큼은 강유에게 반론의 여지가 있다 강유빠들은 위나라 출신의 항장이었음에도(가족도 모두 위에 남아 있었다.) 제갈량의 유지와 촉한 건국의 이념에 따라 부족한 전력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내외적으로 험한 조건에도 북벌의 의지를 꿋꿋이 이어간 만고의 충신으로 평가하고, 당연히 상단의 강유까들의 비판 역시 반박한다. 제갈량 사후 강유의 북벌 규모 자체도 제갈량 시대보다 적게 편성되었고, 9차례나 북벌을 했다고는 하지만 애시당초 이건 연의 설정이고 실제로는 6~7번 정도며 이는 15년에 걸쳐 행한 숫자로 7년간 5번의 북벌을 시도한 제갈량에 비해 더 자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삼국지연의를 포함해 삼국지 관련 소설들 대부분이 제갈량 사후를 아예 생략해거나 매우 간략하게 저술해버리는 바람에 시간 개념과 북벌 횟수 및 규모를 잘못 잡은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제갈량과 비슷한 시간 동안 9번 북벌을 나갔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전쟁광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제갈량의 북벌병력 규모, 출병횟수와 텀을 비교하면 제갈량이 오히려 더 빡세게 굴렸지 강유가 무리한건 아니다. 당장 제갈량 시절에는 매번 10만명씩 동원했는데, 강유는 애초에 제갈량만한 권력이 없어서 1만에서 많아야 몇만명을 부릴 수 있었다. 게다가 1만명으로 자주 북벌한 비의 시절에는 아무말도 없다가 비의가 죽고 제갈량보다 작은 규모로 덜 나갔는데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갈량때는 괜찮았지만 강유가 무리해서 촉이 어려워졌다" 라는건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육개가 언급하듯이 촉한은 환관의 전횡으로 내부 사정은 안 좋았지만 망할때까지 병사들만은 정예였고 국방이 튼튼했다. 화핵 역시 적이 서쪽으로 개미때처럼 몰려들었을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했고, 촉나라는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니 적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며,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복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오나라인들의 폄하와 달리 촉한은 망할 때도 창고에 비단이 수십만필에 수만의 군사들, 염업과 철업이 제대로 살아 있어 이걸 잘 써먹으면 오나라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등애가 말할 정도로 경제력만은 쇠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강유가 본격적으로 군권을 잡고 북벌한 시기는 비의 사후 253년부터 10년 정도인데 253년과 257년 북벌은 각각 제갈각의 북벌에 호응, 제갈탄의 난에 호응해서 군사를 출동시켜 위군과 그냥 병력끼리 대치만 시킨 것이고[114] 262년 후화전투는 제대로 된 기록도 없다. 강유의 본격적인 북벌은 위장군 시절의 254~256년간의 북벌이었고 여기서 단곡의 패배를 제외하면 옹주의 위나라 세력을 단 수만의 군세로만 거의 박살을 내다시피 했다. 또 그나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던 진지 시절이 지나고 황호가 정권을 농단한 이후부턴 강유도 당시에나 지금에나 군사력을 남용한다는 비판받었던 것과 달리 제대로 북벌을 시행한 편이 아니다. 내정에 참여하여 황호를 견제하려 애를 썼고, 답중에서 둔전하며 군량을 축적하고, 한중의 방어시스템을 바꾸는 등의 내정과 군정에 열중한 모습이 더 자주 보인다. 한마디로 대장군 시절의 강유는 오로지 닥치고 북벌만 외치진 않았다. 황호의 발호를 누르지 못한 것 역시 비의가 암살당하면서 권력체계가 붕 떠버렸으며, 촉의 사상(제갈량-장완-비의-동윤) 시절만큼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지와 유선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강유가 손을 쓰기 힘들었다. 방어전략의 변화의 경우는 촉과 위의 국력 차이가 상당히 큰 상황이기 때문에 꾸준히 방어하고 힘을 모으며 내치에 신경을 쓰며 기회를 노리는 전략은 효과를 보기 어렵고[* 똑같이 방어하고 내치에 집중하면 땅덩어리가 훨씬 큰 위나 오의 성장폭이 촉보다 클 수밖에 없고, 촉으로써는 이 성장을 못하도록 상대를 계속 견제해야만 한다. 따라서 촉한의 국가 대전략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적절히 견제구를 날리면서 상대를 흔들다가 정치/군사적으로 빈틈이 보이면 영혼의 한타를 벌여서 큰거 한방을 노린다'으로 고정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가 적절한 견제인지, 한타를 벌일 타이밍이 언제인지 같은 세세한 부분은 의견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계속 북벌을 시도하며 찔러보는 것은 촉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강유만의 망상이 아니고 장완, 비의 등도 공감하고 있었다.] 상대를 끌여들여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기존의 방어 전략에 변화도 없이 다시 공격하는 건 하후무나 조상 같은 멍청이들이나 할 짓이며, 이때 당시 위나라 장수들이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황호가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조차 방해를 놓을 정도로 답이 없는 개막장이라는 것을 간과한게 문제라면 문제지. 역사적 으로 엇갈리는 평가와는 달리 삼국연의라는 불후의 로망스 문학으로 인해 그는 뒤떨어지는 국력, [[암군]] 유선과 [[환관]] [[황호]]의 환상적인 태클, 뛰어난 정치가였으나 북벌에 관해선 의견이 달랐던 [[비의]]의 딴지 등을 짊어지고 [[장익(삼국지)|장익]], [[요화]]등과 고전분투하며 늙어가는 모습으로 미화되어 수많은 촉빠들의 눈물과 지지를 받고 있는 편이다. 또한 [[제갈량]]이 인정한 자신의 후계자라는 점도 그의 인기 상승에 한몫했다. 실제로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등엔 언제나 젊은 얼굴로 매력이 쩔어주신다. 게다가 연의상으로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니 인기투표가 수긍되는 대목이다. 결국 오늘날에도 강유는 평가가 크게 갈리는 인물이라고 할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