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일순 (문단 편집) === 강일순 직계제자 혹은 가족이 세운 교단 === || 교명/통칭 || 창교주 || 창교년도 ||비고 || || 선도교(仙道敎)? || 고판례 || 1911 ||최초의 증산교단, 보천교로 이어짐. || ||<-4>1911년에 고판례가 강일순의 3년상 후 첫 생일을 맞아 치성을 드리던 중 일어나 강일순이 혼령의 목소리로 말하면서 성립된 종교색이 매우 짙은 공동체. 고판례의 집이 있는 전북 정읍시 대흥리를 중심지로 삼아, 완전한 종교단체로 조직되지는 못하였으나 종교성이 짙은 집단을 이루었다. 교단 내부적으로 공적인 자기네 교명을 정한 바 없으나 선도교, 또는 태을교(太乙敎)란 명칭을 사용한 듯하다. 외부에서는 흔히 훔치교(吽哆敎)라 불렀는데, 이는 증산종교인들이 흔히 외우는 [[태을주]]의 첫 구절이 '훔치훔치'로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말 '훔치다'와 연관지은 멸칭이기도 하였다. 고판례를 중심으로 강일순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모였으나, 어느 사이엔가 차경석이 무리의 주도권을 쥐고 고판례와 다른 신도들이 쉽게 만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고판례가 이를 불만스럽게 여겨 1918년에 무리를 벗어나 김제시로 옮겨가자, 남은 사람들은 오롯이 차경석의 사람들이 되었다. 고판례는 1931년에 이상호의 동화교와 합쳐 독립된 교단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1933년에 군산시 오성산 인근에서 제자 고민환의 도움을 받아 은거하다 숨을 거두었다. 본인이 독립된 교단을 세우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나, 고판례를 자기네 정통성의 시작점으로 보는 증산종교들이 존재한다. 고민환, 이기국, 백윤하 등이 고판례로부터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각자 종교를 세웠다. 고민환의 주변에 모인 신자 집단은 이후 큰며느리 일월당 김순자(金純子)가 시아버지의 계통을 이어 치성을 드리는 종교활동을 이끌었으며, 1996년에 김순자가 사망하자 아들이 몇 안 되는 신자들을 이끈다.|| || 증산대도교 외 || 안내성 || 1913/14 || || ||<-4>흔히 안내성 교단이라고 부른다. 경만(敬萬) 안내성(安乃成, 1867-1949)은 강일순이 죽던 1909년에 강일순으로부터 현무경을 받으면서 "너는 3년간 자리를 떠나지 말고 태을경을 읽어라." 하는 말을 듣고, 강일순이 죽은 줄도 모르고 집에서 수련했다고 한다. 3년을 채운 1911년에 나와보니 고판례가 선도교를 세웠으므로 함께 하였으나, 차경석과 충돌하여 1913년, 또는 14년에 고향 여수로 돌아와 따로 종교단체를 창교하였다. 1927년에 김제시로 본부를 옮기고 신자들을 불러모아 신앙촌을 만들었다. 안내성은 자신이 강일순으로부터 신통력을 받았다고 말하고, 신자들에게 주문을 지정하여 각 주문을 일정기간 동안 외우게 했으며, 기간을 다 채우면 다른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1930년 즈음에 보천교의 내분으로 신자들이 떨어져 나오자 흡수하여 교세를 키우고 1931년에 교명을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번 이름을 바꿔 교단의 이름을 하나로 정하기가 어렵다. 1949년에 안내성이 죽자 교세가 크게 위축되고 여러 파로 나뉘었다. 백운기란 사람이 강일순을 천황(天皇), 안내성을 지황(地皇), 자기를 인황(人皇)으로 칭하여 나온 파와, 이를 거부하고 나간 파들이다. 이중 백운기 집단은 맥이 끊겼고 다른 파도 교세는 미미하다. 홍범초가 저술한 범증산교사에 따르면 현무경을 안내성이 가지고 있었는데 차경석이 인수했다고 한다. || || 미륵불교 || 김형렬 || 1915 ||강일순의 수제자가 세움. || ||<-4>강일순의 수제자 태운(太雲) 김형렬(金亨烈, 1862-1932)이 세운 교단. 1911년에 고판례 주변으로 신자들이 모이자, 김형렬은 강일순의 첫 부인 정치순에게 다가가 역시 고판례처럼 강일순의 혼령과 접촉하게 하려고 하였다.[* 김형렬이 고판례가 강일순에게 종통을 받아서가 아니라, 사후에 그 혼령과 접촉했기 때문에 영험을 보였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씨 부인은 김형렬이 시키는 대로 주문을 외우던 중 기절할 뿐 특별한 영험을 보이지 못하자, 결국 1915년에 자신이 직접 (강일순이 도통을 얻었다는) [[모악산]]의 금강대(金剛臺)에 들어가 백 일간 수련한 끝에 신안(神眼)을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김형렬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김형렬은 희한하게도 [[태을주]]를 사용하지 않고 [[동학]]의 삼칠주(21자 주문)를 중시하였다. 또한 강일순을 [[미륵]]이라고 말하고, [[금산사]]에 있는 미륵불상에 강일순의 혼령이 깃들었다 하여 금산사에 작은 사무소를 짓고 교단 본부로 삼았다. 이후 금산사에서 치성을 드리다가 독립운동을 모의한다는 밀고로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신도들 중에 죽은 사람도 나왔다. 보천교가 망하리라 예언하였는데 과연 보천교에 내분이 일어나 갈라지자 예언이 맞았다 하여 입교자가 늘었으며, 보천교 탈퇴자 일부를 흡수하였다. 강일순의 일대기를 기록하려는 이상호를 만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미륵불교는 이렇게 김형렬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럭저럭 발전하였으나, 예언이 틀리자 실망하여 신도들이 나가는 등 부침을 겪고 1932년에 김형렬이 사망하자 교세가 폭락하였다. 이후 교단이 분열하였으나, 그중 일부가 1951년에 미륵불교 법상종(彌勒佛敎 法相宗)이라는 불교종파로 문광부에 등록하였다.[* 불교에서는 법상종이 미륵신앙과 관계가 깊다 하기 때문에 법상종의 이름을 사용한 듯하다. 또한 법상종을 (강일순도 중요한 인물로 언급한) [[진표(신라)|진표율사]]가 창종했다 하므로 더욱 그 이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미륵불교 법상종이 대한불교 법상종에 흡수되었단 자료도 있고, 따로 '미륵불교 법상종 총본부'라는 이름을 쓰는 교파도 있어서 확인이 필요하다. || || 태을교 || 박공우 || 1916? ||의통인패를 받았다고 주장한 사람임. || ||<-4>인암(仁菴) 박공우(朴公又, 1876-1940)의 이름을 따서 박공우 교단, 혹은 박인암 교단이라고 부른다. 박공우는 강일순이 죽기 전날 밤에 몰래 의통인패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후대의 증산종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강일순이 죽은 뒤 (강일순의 또다른 제자) 김경학이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상 앞에서 기도하여 강일순의 혼령을 만났다고 말하자, 여기에 자극 받아 자기에게도 도움을 달라고 기도하여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정읍에서 포교하다가 1916년에 태인으로 옮겨 ‘태을교’란 이름으로 포교하였으며, 1926년에는 다시 금산으로 옮겼다가 1940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박공우의 맥을 이은 종교단체는 미미하다. 강일순으로부터 사람(이상호)이 올 때까지 입을 곤륜산같이 무겁게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 || [[보천교]] || 차경석 || 1918? ||증산종교 역사상 최대종교였으며 일제강점기에 크게 흥성했으나 쇠락함. || ||<-4>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이 세운 교단. 차경석은 이종 누나 고판례가 1911년부터 모아 생긴 신자단체를 흡수하여 결국 독자적인 교단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6백만 교도를 모았다고 주장했는데, 과장이 섞였다 해도 몇백만 명 정도는 실제로 모은 듯하다. 1918년에 고판례가 무리에서 나가자 남은 신자들을 이끌고 종교단체로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시에 있는) 황석산(黃石山)에 올라 천제(天祭)를 지냈는데, 축문에서 나라 이름을 대시국(大時國),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 밝히고 제사를 끝낸 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달아났다. 이 일로 차경석이 차 [[천자]]라 불리고, 교단의 직위가 미래에 조선 땅에 세워질 나라의 계급이라는 소리가 돌았다. 강일순을 천사(天師)라 부르며 교조 겸 신앙대상으로 삼았으나, 훗날 차경석이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버리면서 교단이 둘로 쪼개졌다. 1936년에 차경석이 죽자 일제는 유사종교해산령을 내려 교단을 해체하였다. 광복 이후에 교단을 복구하였으나 교세는 미미하다. 자세한 내용은 [[보천교]] 항목 참조. || || ? || 문공신 || ? || || ||<-4>흔히 이름을 따서 문공신 교단이라고도 하고, 문공신이 강일순에게 영산(瀛山)이라는 호를 받았으므로 문영산 교단이라고도 한다. 그 이름대로 문공신(文公信: 1878-1954)을 중심으로 하였다. 문공신은 전라도 정읍 사람인데 천주교에 입교하였을 때 얼마 되지 않아 구절을 외워 신부가 놀라 대재라고 하였다고 한다. 강일순 사후 수도에 전념하고 7년 천지공사를 보며 소탈하게 살았다고 한다. 문공신 사후에 김동섭(金洞燮)이 교단을 이끌었으나 현존하는 교세는 미미하다. 조철제가 강일순의 시신을 가져갔으므로 추적하여 잡았으나 조철제에게 역신고를 당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강일순의 시신 사건은 조철제의 추종자인 [[태극도]] 신자들이 설명하는 바와 다른 증산계 종교 신자들이 설명하는 바가 매우 다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 참조. 아무튼 조철제와 시신을 둘러싸고 싸우다 옥고를 진 일로 일부 증산종교인들에게는 의로운 사람이라 존경받는다. || || 제화교(濟化敎) || 이치복 || ? || || ||<-4>강일순이 말년에 거둔 제자 이치복(李致福: 1860-1944)이 세운 교단. 이치복은 정심요결을 공부하였다. 삼덕교를 세운 허욱에게도 도를 전해주었다 한다. || || [[증산법종교]] || 강순임 || 1937 ||강일순의 무남독녀 강순임이 남편과 함께 세운 교단. || ||<-4>증산 강일순과 첫째 부인 정치순 사이에서 태어난''' 무남독녀''' 강순임이 중심이 되어 1937년에 창교한 단체이다. 강일순이 숨을 거둔 후 시신을 둘러싸고 다툼과 문제가 많았는데, 강순임 생전에 증산법종교의 신앙대상이자 자기 아버지기도 한 강일순의 유해를 증산법종교 내부로 이장하였다. 여러 증산종교인들이 강일순의 무덤에 참배하고 증산미륵존불상을 보고자 증산법종교 중앙본부로 순례하러 오지만, 일부 증산종교에서는 강일순이나 고판례가 했다는 예언적인 발언을 내세워 무덤의 진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경, 화은당실기, 증산법종교 60년사 등 다양한 서적들을 간행하였다. 증산법종교의 건물은 시대의 양식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는 이유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강순임의 남편 김병철(金炳澈)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김삼일이 양모 강순임의 후계를 주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청도대향원을 세워 분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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