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일순 (문단 편집) === 그 이후의 교단 === || 교명/통칭 || 창교주 || 창교년도 ||비고 || || 모악교(母岳敎) || 여처자 || ? ||교단으로 조직화되지 않음. || ||<-4>[[경상남도]] [[하동군]]에서 출생한 여처자(余處子, 1887-1954)의 교단을 흔히 일컫는다.[* 처자(處子)란 단어가 미혼여자([[처녀]])란 뜻이므로 '여처자'는 '여씨 처녀'란 의미지만, 마치 이름처럼 여처자로 알려졌다. 본디 이름은 원월(圓月)이라고 한다.] 차경석이 황석산에서 제사를 올릴 적에 자리에 참석하는 등 보천교와 관계가 깊어서 보천교도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여처자가 보천교에 입교한 적은 없다고 한다. 차경석에게 청혼받았으나 거절했으며, 여러 기행과 신기로 추종자들을 많이 모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6.25 전쟁]]을 예측했다는 일화가 있다. 모악교에서는 여처자를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이라고 부른다. 증산교 대법사와 마찬가지로 용화동에 본부가 있지만, 지금은 그 세가 미미하다. 여처자가 종교화에 별 관심이 없었고, 추종자들도 여처자가 사망한 이후로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고 흩어졌으며, 지금은 나이든 추종자들이 소수 모이는 정도인 듯하다. 여처자의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추종자들이 뭉친 모임 정도였으므로 교단으로 언제 성립되었다고 시기를 말하기가 어렵다. 1995년에 정신세계사에서 박문기(朴文基)라는 사람이 여처자 이야기를 소설화한 책 본주(本主)를 출판하였으나 절판되었다. 저자 박문기는 여처자가 거둔 수양딸 최영단의 아들이라고.|| || 삼덕교(三德敎) || 허욱 || 1920 ||이치복에게서 도를 전해받았다 함. || ||<-4>1920년 전라남도 보성 출신 허욱(許昱, 1887-1939)이 창교한 종교. 정통성을 강일순의 말년 제자 이치복에게서 찾는다. 창교주 남송 허욱은 1935년에 총독부가 유사종교해산령을 내리자 반일투쟁에 참가하여 독립지사들과 접촉하였으나, 1939년에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1945년에 광복이 되자 허욱의 아내 정미봉(鄭米峰)을 중심으로 삼덕교를 재건하고, 서상범(徐相范)을 교단의 대표로 추대하였으며, 본부를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 아래로 옮겼다. 2012년에 종교법인을 설립하여 등록하였다. 김제시에 본부가 있으며 경전으로는 남송선생실기(南松先生實記), 생화정경(生化正經) 등이 있다. [[http://cafe.naver.com/samduckgyo|네이버 카페]]|| || [[태극도]](太極道) || 조철체 || 1921 || || ||<-4>1918년에 조철제(趙哲濟, 1895-1958)[* 1895년 음력 12월 4일생인데, 양력으로 환산하면 해를 넘겨 1896년 1월 18일생이다. 그래서 생년을 1895년이라고 할 수도 있고, 1896년이라고 할 수도 있다.]가 세운 교단. 첫 교명은 무극도(无極道) 또는 무극대도(无極大道)라고 하였다.[* [[无]]자는 [[無]]의 옛 형태이자 이체자, 즉 모양은 달라도 음과 뜻이 같은 한자이다. 조철제 교단은 [[无]]자를 사용하였으나, 어차피 [[無]]와 음과 뜻이 같으니 외부의 사람들은 흔히 [[無]]자를 쓴 듯하다.] 태극도 경전에서는 조철제의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철제는 식민지가 된 조선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여 (오늘날 경상남도 함안에 있는) 고향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던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인에게 사기를 쳐서 거액을 마련한 뒤, 화약공장을 만들고 무기를 모으다가 들통이 났다. 15살 되는 1909년 6월 15일(음 4월 28일), 일본제국 경찰을 피해 창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피신하고자 하였다. 이날 오후 1시가 지나 기차가 대전에 이르렀을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 환상 속에서 웬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다. 그대는 내 도통을 이어 무극대운의 공사를 이루라. (중략) 그대의 호는 정산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 시루와 솥의 사이)이 되어 도로써 한 몸을 이루리라.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상제(天尊上帝)니라.” 하고 말했다.[* 태극도 교단은 이 사건이 일어난 1909년을 도기(道紀) 원년으로 삼아 연도를 헤아린다.] 그 뒤 조철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종교적 수련을 병행하여 강일순으로부터 여러 가지 신통을 받았다 주장한다. 1917년(23살)에 강일순의 신탁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1919년에 강일순의 여동생 선돌부인을 만나, 선돌부인이 사는 집에서 영감이 내려 강일순이 숨겨둔 주문서과 (강일순이 쓴) 부서符書 현무경을 찾아내었다. 1921년(27살)에는 강일순의 유족들과 의논하여 초빈을 파하고 백골을 꺼내어 따로 모시고 조석으로 치성을 드렸는데, 태극도 교단은 이때 비로소 조철제가 교단을 처음 창설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1922년, 강일순의 제자 문공신 등 일행 스무 명이 들이닥쳐 조철제가 만든 신단을 파괴하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두들겨 팼으며, 강일순의 백골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이때 조철제도 오른쪽 손목을 맞아 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이런 소란에 강일순의 왼손 뼈만 남았으므로 이를 따로 챙겼다. (이 사건에 대해서 다른 증산교단들은 완전히 다르게 주장한다. 다른 교단들 주장에 따르면 조철제는 강일순의 유족들 몰래 초빈을 파헤쳐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공신이 분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을 이끌어 시신을 되찾아 왔으나, 조철제가 문공신 등을 고발하여 법원의 판결을 받았는데, 조철제는 뇌물을 먹여 고작 1년밖에 형을 살지 않았으나 문공신은 7년간 복역해야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의 진실 여부를 두고 태극도/대순진리회 사람들과 다른 증산종교인들이 서로 싸운다.) 1935년에 총독부가 유사종교해산령을 내려 교단이 해산되었지만, 광복 후 조철제는 1948년 부산에서 추종자들을 모아 교단을 복구하고, 교명을 무극도에서 태극도(太極道)라고 바꾸었다. 그 뒤로도 교단을 이끌며 종교생활을 하다가 1958년 4월 24일 부산 본부에서 만 62세[* 태극도 교단은 음력 기준 한국식 나이로 헤아려 '64세'라고 설명한다.] 숨을 거두었다. 부산 감천동 태극도 마을(감천문화마을)이 바로 태극도 신앙촌이다. 태극도에서 훗날 [[대순진리회]]가 갈라졌다. 2001년에는 조철제의 아들과 태극도 교단이 조철제의 무덤 이장을 두고 법정공방을 벌였다. 조철제 사망 이후 교단에서 무덤을 관리했는데, 유족들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자 무덤 자리가 나쁘서 그런가 싶어서 이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교단이 이장에 반대하자 유족들이 법원에 소송한 것이다. 부산고법은 '태극도 교단이 40여 년간 망인의 분묘를 잘 관리했고, 그 유족들도 여기에 별 이의가 없었으므로 이제 와서 무덤을 이전하거나 인도를 요구할 수는 없다.'고 판결하여 언론에 보도되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52138|연합뉴스 보도내용]] [[http://www.tgd.or.kr/site/news2/index.php?key=&phone=|홈페이지]] || || 순천도(順天道) || 장기준 || 1920 || || ||<-4>강일순이 부적 등을 그려 남겼다는 현무경(玄武經)을 중심으로 하는 파. 장기준(張基準)이라는 사람이 강일순의 수제자 김형렬의 밑에서 있었는데 김형렬의 예언 등이 실패하자 크게 실망하여 이탈하였다. 그 후 차경석 집에서 필사한 현무경을 바탕으로 공부하다가, 1917년 고향 순천 쌍암(雙岩)에 있는 제왕봉(帝王峰)에 올라가 서전 서문을 1만 번 읽은 끝에 현무경의 깊은 뜻을 깨쳤다고 한다. 1920년에 강일순의 제자 김경학(金京學)에게 연원을 받아 순천도를 창교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종교단체로 운영되며 신도들은 직접 현무경을 그리며 공부한다. 다른 증산계열 종교와 달리 강일순의 본의가 주문이 아니라 현무경에 있다 하여, 주문에는 관심이 없고 현무경에 집중한다. 1922년에 장기준이 사망한 뒤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 오성산 성덕리 교단 || 김순자 || 1936? || || ||<-4>강일순의 셋째 부인 고판례는 오성산 성덕리에 사는 수제자 고민환 집에서 1935년에 사망하였다. 1936년부터 1996년까지는 고민환의 큰며느리 일월당 김순자(金純子, 1920-1996)가 고판례를 보고 모인 신자 집단을 이끌었으며, 지금은 고민환의 손자가 이끈다. 편의상 ‘교단’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모악교와 마찬가지로 조직화되지 않았으므로 명확한 성립시기를 말하기가 어렵다.|| || [[증산교 본부]] || 이상호 || 1945 || || ||<-4>청음(靑陰) 이상호(李祥昊, 1888-1966), 남주(南舟) 이정립(李正立, 1895-1968) 형제가 1945년 광복 후 세운 교단. 이상호는 한학에 통달한 사람이었고 이정립은 [[일본]]에 [[유학]]까지 한 지식인이었다. 본디 보천교의 신앙인으로서 월간지 보광을 발간하고 시대일보를 인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후 강일순의 수제자 김형렬 등을 만나기도 하였다. 형제가 강일순의 둘째 부인 고판례를 모시고 동화교를 창립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탄압을 받아 해산하였다. [[광복]] 후에 증산교 대법사를 창립하였다.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증산계열 종교단체에 필요한 여러 책을 다수 집필하였다. 증산계열의 대표적인 경전인 대순전경을 비롯하여 대순전경의 전신인 증산천사공사기를 비롯하여 고부인신정기(천후신정기)ㆍ대순철학ㆍ증산교사 등 여러 저서를 남겨 강일순의 흔적을 후대에 전했다. 범증산교사를 작성한 [[홍성렬]](범초)교수가 증산교 대법사에서 종령을 역임하였고 이중성의 천지개벽경과 다른 천지개벽경과 선도신정경을 발간한 정영규 선생도 이곳에서 종령을 역임하였다. 아직도 신앙인들이 있어 신앙을 계속 이어간다. 본부는 김제시 금산면 용화동에 있는데, 통천궁을 중심건물로 삼고, 강일순이 박공우에게 전해주었다는 의통인패의 원본을 보관한다.|| || [[대순진리회]] 계통[* 나무위키에서는 대순진리회에서 갈라져나온 대진성주회나 용화대미륵선도회 등 분파들도 함께 대순진리회로 묶어서 설명한다.] || 박한경 || 1969 || || ||<-4>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증산계열 종교로, 태극도 도전이었던 박한경이 창교하였다. 증산계통 종교에서는 '''신도수가 가장 많다.'''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의 종교 항목에서 명시된 8개 종교명에 대순진리회가 있을 정도였다. 즉, 대순진리회 하나만으로도 통계상 대한민국 8대 종교에 해당한다. 1대 교주 박한경 도전이 사망한 뒤 현재 수십 개 방면으로 분열되었는데, 심지어 분열된 방면들도 증산계통 종교 중에서는 규모가 상당할 정도이다. [[증산도]] 신자들도 교리서 표절이나[* 관련도서마다 표절을 금한다는 경고문구가 있다.] 사칭 등 이유로 대순진리회를 매우 싫어한다. 대순진리회에서는 사회복지, 교육사업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하는데, 대표적으로 대진대학교와 상생복지회 등이 있다.|| || [[진혜원(종교)|진혜원]](眞慧院) || 장영주 || 1970 ||증산도의 ‘마패’와 얽혀있다. || ||<-4>호산 장영주가 1970년 경기도 고양군에 처음 세운 종교단체. 지금은 충청남도 서산시로 옮겼다. 강일순을 [[미륵]]으로 믿는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 [[증산도]] || [[안세찬]] || 1978 ||현존하는 가장 활발한 증산계 종교 || ||<-4>1978년에 대법사 증산교라는 교명으로 창교되었으나 1984년에 '증산도'라는 교명을 확정하였다. 1980-90년대에 유행한 민족주의에 편승하여 역사 바로찾기 운동을 하는 등 포교와 연결지어 활용하여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었다.[* 증산도의 포교전략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1) 여러분,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곡되었음을 아십니까? 환단고기에 따르면... (2)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정말 위대합니다! (3) 위대한 우리 민족에게 상제(上帝) 신앙이 있었지요. (4) 우리 민족이 믿던 그 상제님이 바로 강증산이십니다! ..라는 식으로, 민족주의 감정을 포교활동으로 연결하였다.] 이러한 포교전략은 특히 대학생들에게 먹혀서 전국 대학 동아리방에 증산도 학생회가 폭넓게 조직되기도 하였는데, 이때 입교한 대학생들이 나중에 증산도의 중심적인 세대가 되었다. 케이블 방송국([[상생방송]])을 개국하여 태상종도사 운산 안세찬, 종도사 경전 안중건의 환단고기 북콘서트 등 다양한 컨텐츠를 포교에 활용한다. 증산계통 종교들 중 가장 '''이론적인 교리 정립에 심혈을 기울인 단체'''로 평가받는다. 교단에서는 자기네 경전 '도전'이 기존 다른 증산종교들의 경전 내용에 자신들이 답사하고 확인한 내용까지 더하여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풍부하다고 선전하며, 외국어로 번역도 하였다.[* 그러나 탈퇴자들이나 다른 증산계열 종교인들은 도전이 증산도 교단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실었고 왜곡하였다고 비판한다.] 산하 출판사 상생출판은 강일순의 사상이나 관련도서, 그리고 [[환단고기]] 등을 발간한다.민족주의를 적극 받아들여 [[환단고기]] 등 [[유사역사학]]적 주장이 교리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 외에도 [[채널러]]들의 주장과 [[지구공동설]] 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였다. 본부는 대전광역시 한밭대로에 있는 태을궁 증산도교육문화회관이다. [[http://www.jsd.or.kr/|홈페이지]]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