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일순 (문단 편집) === 젊은 시절 === 강일순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가 일어난 해에 전라도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에 있는 외갓집에서[* 현재의 주소로는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팔선리 서산마을. 강일순의 본가에서 북쪽으로 4.5 km쯤 떨어져 있다. 강일순의 외갓집 건물은 이미 허물어져 지금은 자취를 찾기 힘들다.] 강문회(姜文會) · 권양덕(權良德)[* 아버지 강문회는 1846년에 태어나 1911-17년 사이에 사망하였다. 어머니 권양덕은 1850년에 태어났으나 사망년도를 알 수 없다.] 부부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현 주소로는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 신송마을에서 서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에 있는 친가에서 성장하였다. ||증산종교들의 경전에서는 강일순이 친가가 있는 객망리에서 태어났다고 쓴 경우가 많다. 이상호는 최초로 강일순의 삶을 기록한 경전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1926)를 편찬하면서 강일순이 서산리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서술했으나, 대순전경大巡典經 초판(1929)에서 객망리라고 바꾸었다. 객망리가 강일순이 태어난 곳이라고 쓴 첫 서술이 대순전경 초판이다. 이러한 자료상의 혼란으로 강일순의 삶에 대한 인터넷 글에서는 강일순이 태어난 곳이 서산리 외가/객망리 친가로 내용이 갈린다. 객망리(客望里)라는 이름이 '손님을 바란다/기다린다'는 뜻인데, 이상호는 지명을 강일순과 연계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이미 예언된 인물이라고 신성화하고자, 친가에서 태어났다고 한 듯하다. 이렇게 교조의 고향 지명으로 "우리 종교 교조께선 이미 지명으로 예언된 인물이다!" 하고 주장하는 사례는 우리나라의 신흥종교단체에서 꽤 흔하다. 설령 객망리가 강일순이 태어난 곳이 맞다고 해도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 신송마을 신송길32에 姜甑山上帝降世地(강증산상제강세지)란 현판을 단 가옥이 있어 증산종교인들이 이곳으로 순례하러 오곤 하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강일순이 태어났다고 지목하는 곳이 1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이후 강일순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나이를 언급할 때에는 [[세는나이]]로 통일함.) 양반인 진주 강씨의 자손이라고 하나, 강일순이 태어날 무렵에 그 집안은 사실상 농민이었다.[* 사실 조선시대의 법적인 기준으로 4대 이상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그 자손은 [[양반]]의 자격을 잃는다. 하지만 법적으로 양반의 자격을 잃었다 해도 자신들은 양반이지 천민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당초에 조선의 법적인 신분은 양천제로 노비인 천민 아니면 양반, 흔히들 상민이라 하는 평민 등을 포함한 양인이 있을 뿐이라 양반 지위를 상실해도 형벌, 채무 등으로 노비가 되지 않는 이상 평민일 뿐으로 그나마도 법적인 신분은 양인으로 같으며 다시 여기서 과거에 급제를 하면 양반이 된다. 즉 '양반-(4대 이상 급제 실패시)-평민-(과거 급제시)-양반' 인 셈] 그 집안이 가난하여 다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강일순에게 기대를 걸고 글공부를 시켰다.[* [[증산도]] 도전 등을 보면 이런 일화가 있다. 아버지가 옆 마을에서 무리하여 훈장을 초빙하여 글공부를 시키는데, 훈장이 [[천자문]]을 펴고 하늘천 따지를 가르치자 거기까지만 읽더니 더 이상 따라 익히려 하질 않았다. 그래서 왜 공부하려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강일순은 "하늘천을 배워 하늘의 이치를 알고, 따지를 배워 땅의 이치를 배웠다면 더 배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늘천 따지, 두 글자만 배우고 혼자서 한학을 익힘은 말이 안 되므로 이 일화는 후대의 증산종교단체들에서 교조 강일순을 미화, 과장한 것일 것이다. 증산천사공사기 등 초기기록에서는 강일순이 매우 영특하여 한학을 쉽게 배웠다고는 해도, 하늘천 따지만 배우고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후 강일순은 훈장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한학을 익혔다. 머리가 영민했다고 하지만 집안이 어려워 본가와 근처에 있는 외가를 오가며 생활했다. 1884-5년 무렵, 강일순이 14~15살이 되었을 즈음, 글공부를 중단하고 집에서 나와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머슴살이를 하거나, 나무를 베거나 하면서 입에 풀칠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삼 년 떠돌아다니다가 그나마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891년, 21살이던 해, 강일순은 [[동래 정씨]] 정치환(鄭致煥)의 딸[* 진주강씨족보 확인.]인 정치순(鄭治順)이라는 18살 난 여인과 결혼했다. 그런데 정씨 부인은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고 얼굴이 얽었다고 한다. 요새 기준으로도 안 좋은 조건인데,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결혼하기에 큰 결점이었다. 증산계 종교들의 경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머니 권 부인이 며느릿감을 너무 까탈스럽게 고르느라 이런저런 후보들을 다 쳐내니 남는 여자들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누구든 청혼만 하면 며느리로 삼으리라 다짐하였는데 정씨 집안에서 청혼하므로 둘을 결혼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절름발이 여자와 결혼함은 지나친 감이 있다. 실제로는 강일순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상당한 악조건을 감수하고 아내를 맞을 수밖에 없었을 공산이 크다. [[증산도]] 등에서는 정치순의 성격이 좋지 않아 시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정치순을 중요시하지 않는 증산계 종교에서 그 성품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강일순은 결혼한 이후 [[김제]]에 있는 처남 정남기(鄭南基)의 집[* 현 주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 내광리]에 서당을 차려놓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생활하였다. 집안이 어려워서 도저히 아내를 친가로 데려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남 집에는 책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도술이나 술법에 관한 책도 상당수 있어서 모두 독파했다고 한다. 1894년, 24살이던 해에 [[동학 농민 운동]]이 바로 고향인 고부군에서 일어났다. 강일순은 어린 시절부터 주술이나 종교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나 고부군은 전라도 동학의 중심지였으므로, 당시 조선에서 신흥종교로 이름을 떨친 [[동학]]과 틀림없이 모종의 연관이 닿았다. 하지만 강일순이 동학과 얼마나 관계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때 아예 동학의 신도로 입교했다는 말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강일순이 동학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얼마간 거리를 두었음이 확실하다. 동학군이 가는 곳을 따라다니기는 하였으나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고 형세를 관망할 뿐이었다. 증산종교들의 경전에서는 이때 강일순이 동학군에 합류하려는 사람들을 말렸다고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형세를 관망하면서 동학군이 결국 패배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1895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일본인들 손에 죽었다. [[동학 농민 운동]]의 결과를 지켜본 뒤 강일순이 무엇을 했는지 행적이 분명하지 않다. 처남네 집으로 돌아와 다시 훈장 노릇을 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동학 운동의 결과를 지켜보면서 결정적으로 동학에 회의하였음은 분명하다. 강일순은 [[최제우]]가 가르친 주문으로 도통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며 도통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애쓴 듯하다.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도술을 부리길 바랐던 것이다. 일부 경전은 이해에 강일순이 어떤 노인으로부터 비서(秘書)를 받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슨 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 특히 [[원불교]] 쪽 사람들은 이때 강일순이 받았다는 책이 아래에서 설명할, 강순임이 송규에게 건네주었다는 정심요결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정말로 이때 책을 받긴 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1896년, 조선은 양력 1월 1일을 기점으로 [[태양력|양력]]을 도입하고 건양(建陽) 연호를 제정하였다. 고종이 [[아관파천]]하였다. 1897년, 27살이던 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칭제건원하여 연호를 [[광무|광무(光武)]]라 정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바꾸었다. 이해에 강일순은 처남 집을 떠나 유랑여행을 시작하였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음은 분명하지만 언제 어디를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다. 증산종교들의 경전에서는 이렇게 유랑하던 시기에 김일부를 만났다고 서술한다. ||김일부金一夫(1826-1898)는 [[충청도]] 사람으로 본명은 김항(金恒)이고 '일부'는 호이다. 남학(南學) 쪽 전승에 따르면 김일부는 이운규(李雲圭)란 선비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 [[주역]]을 깊이 파고들어 정역(正易)이란 책을 쓰고 영가무도(詠歌舞蹈)라는 주술적인 춤을 만들자 추종자들이 생겨 충청도에서 교단을 창설하였다. 수정 전에는 김일부가 남학을 만든 것처럼 기술되었으나, 남학의 창시자는 김광화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남학 교단에서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도 이운규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을 따른다면 [[최제우]]와 김일부는 동문이 되지만, 남학 계열에서만 주장하는 내용으로 역사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다. 세 사람의 나이와 활동시대도 10-20년 이상 차이가 나므로, 이 설은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산 신봉단체에서 이 설을 퍼뜨려 정설처럼 굳어졌다. [[증산도]]의 도전에는 김일부가 꿈에서 상제를 만났는데, 이튿날 강일순을 만나자 바로 상제의 얼굴이었으므로 크게 경대했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나온 증산천사공사기 등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강일순을 만나기 전날, 김일부가 꿈을 꾸었는데 두 사람이 같이 하늘에 올라가니 상제가 강일순을 매우 칭찬하였다고 한다. 다음 날 강일순이 찾아왔으므로 김일부가 기이하게 여기고 요운(曜雲)이라는 도호를 지어주며 높이 보았다고 한다. 김일부가 1898년에 타계했으므로 그 전년도에 여행을 시작한 강일순과 만났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정말로 만났을지 상당히 미심쩍다. 또한 강일순보다 50살이나 많은 70대 노인이었으며, 이미 추종자들이 모여 교주로 지내던 김일부가 강일순과 정말로 만났다고 해도 경대하였을지 더욱 의심스럽다. 결정적으로 김일부 계열 교단의 경전에는 강일순을 만났다는 이야기 자체가 없고, 도전보다 먼저 편찬된 경전들(후술된 대순전경 등)의 기록과도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사실 이러한 왜곡/변형 주장은 종교사적으로 흔하다. 전술한 남학의 왜곡도 한 예.] 참고로 증산도 측은 자기네 경전이 증산 관련문헌들 중 가장 잘 정비되었고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하지만, 일단 제작연대부터 기존문헌들과 달리 현대라, 강일순 추종자들이 대부분 사망하여 직접 만나본 증인은 얼마 없다. 기껏해야 강일순 생존 당시 10대 남짓이던 김호연(1897-1992)을 비롯한 몇몇을 만난 정도. 거기다 기존 문헌들 역시 여러 차례 증언을 재수집하여 많이 개정증보하였다.[* 주류학계에서 인정하는 문헌인 대순전경은 13판까지 나왔으나 도전은 2003년에 개정판이 나왔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증산도 도전에선 강일순이 죽으면서 자기가 남긴 글을 다 불태우라 명령했다고 서술하지만, 강일순이 쓴 현무경[* 다만 판본들마다 내용 차이가 좀 있어 정본이 무엇인지 논란이 있다.]과 강일순이 구술하고 수제자 김형렬이 받아 적은[* 김호연을 만나 중화경이 쓰여진 배경을 전해들은 우철석 선생 증언] 중화경이 현존한다.|| 1900년, 30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내 정씨 부인은 강일순을 붙잡고 "이제 가정에 충실하라." 하고 애원했지만 강일순은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아내와 집안을 외면하고 도통을 찾아 바깥으로 돌아다녔다. 고향 동네 앞산 시루봉[* 시루산이라고도 부르며, 이 지명을 한자로 번역하면 증산(甑山)이 된다. 강일순은 호를 동네 앞산에서 딴 것이다. 강일순의 부모 강문회 부부의 합장묘도 시루봉에 있다.]을 오르내리며 주문[* 증산계 종교의 설명에 따르면 강일순이 시루봉에 있는 동안 외치고 다닌 주문이 진법주(眞法呪)라고 한다. 여러 증산계 종교들이 진법주를 사용하지만, 세부적인 구절은 교단마다 서로 다르다.]을 외우고 큰소리를 지르며 다니자, 동네 사람들이 광인으로 취급하여 상종하지 않았다. 강일순이 산에 있는 동안, 정씨 부인이 밥을 해서 집과 산을 오가며 수발했다고 한다. 비록 시루봉이 해발 100 m밖에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다리를 저는 아낙네가 음식을 지고 오르내리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밤중에 배가 고프면 시루봉에서 내려와 가까이 있는 집에서 물 한 잔에 쥐눈이콩[* 한자로 서목태(鼠目太)라고 하기도 하고, 약효가 있다고 약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쥐눈이콩은 특정한 콩 종류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검정콩들 중 크기가 작은 것을 싸잡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여우콩(''Rhynchosia Volubilis'')이 대표적인 쥐눈이콩인 듯?]을 얻어 먹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