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일순 (문단 편집) === 도통과 천지공사 === 1901년, 31살에 [[전라북도]]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大院寺)란 절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수도하여, '''음력 7월의 어느 날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도통의 경지를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대원사에서 수도한 기간이 자료에 따라 서로 말이 다르다. 어디에서는 21일, 어디에서는 49일이라고 서술하므로, 기간에 대해선 명시하지 않고 그저 대원사에서 수도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도통을 얻은 날짜도 어디서는 음력 7월 5일, 어디서는 음력 7월 7일이라고 주장한다. 아예 수도기간과 정확한 도통일자를 말하지 않고 "음력 7월에 대원사에서 도통하셨다."라고만 서술한 자료도 있다. 강일순은 이때 얻은 경지로는 부족했는지, 추후 비슷한 집중수련을 한 번 더한다.][* 증산종교들이 설명하기를, 도통하게 되면 눈앞에 삼계가 환히 보이며 삼생(三生)이 밝게 비치고 일원세계(一元世界)가 눈앞에 있고 사해중생(四海衆生)이 마음에 나타나며, 모든 이치가 뚜렷이 드러나고 만상(萬象)이 펼쳐지며, [[서양]]에도 마음대로 가고 하늘 끝으로 새처럼 날아오르기도 하며, 풍운조화(風雲造化)가 마음대로 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이 하고자 하는 대로 이루어지며, [[천지]]가 내 마음과 일체가 되고 [[삼교]](三敎)를 두루 쓰며,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고 한다. 이는 제자 김형렬의 증언이다. 대체로 현대에 생긴 증산교단들은 도통을 후천개벽이 마무리된 후에 얻게 되는 경지라 가르친다.] 이후 강일순은 확실히 자기 자신을 어떤 신적 존재라고 생각할 만한 말을 하였다. [[옥황상제]]라고도, [[미륵불]]이라고도 하였다. 관련자료들이 온통 강일순을 신화화하고 각 교단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윤색되어 강일순이 구체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하기 어려우나, 세상을 구제할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음은 분명하다. ||도통했다고 한 그해 겨울, 강일순은 고향집에 머물다가 갑자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나 공명첩 등을 싸그리 불태우며 "족보가 나에게서 다시 시작하며, 모든 공명(功名)이 나에게서 다시 새로워진다."(그러니까 이런 족보 등은 필요가 없다.) 하는 요지로 말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놀라 부모며 같은 마을 친척들이 달려와 말렸으나 강행했다. 이 일이 강순임이 태어난 1904년, 혹은 죽음을 앞둔 1909년에 있었다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다.|| 1902년, 32살에 첫 제자 김형렬(金亨烈, 1862-1932)을 만나 그 집에서 거처하였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아는 사이긴 했지만 이때부터 비로소 완전한 스승-제자 관계가 된 듯한데, 김형렬이 강일순보다 9살이 많았다. 이후 강일순이란 사람이 신통한 도인이라는 소문이 돌아 제자가 될 사람들이 찾아왔다. 강일순은 여러 주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외우게 하고, 세상의 여러 나쁜 것들, 재앙을 없앤다는 여러 가지 주술적인 행위들을 하였다. 이런 행위를 강일순은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불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온갖 재앙이며 원한들이 떠도는데, 원한을 풀어주고 천지공사를 함으로써 개벽의 때가 지나가면 살기 좋은 이상세계가 도래한다고 강일순은 주장하였다. 이듬해인 1903년, 김형렬이 집을 [[전라도]] 전주군 동곡마을[* 현재의 주소로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銅谷)이란 말이 '구릿골'이란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 증산종교인들이 쓴 글에서는 구릿골이라느니 구릿골 약방이라느니 표현하기도 한다.]로 옮기자 역시 동곡으로 따라들어왔다. 이후 강일순은 주로 동곡마을 김형렬 집에서 거처하며 본가와 다른 곳을 오갔다. 강일순이 장남으로서 부모를 봉양하거나 하는 일은 이후로 없었다. 1904년, 34살이던 해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은 더욱 상황이 어려워졌다. 이해에 딸 강순임(姜舜任, 1904-1959)이 태어났다.[* [[증산도]] 자료는 강일순이 지어준 초명은 이순(二順)이었고, 순임은 결혼한 뒤 남편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강순임 여사가 개창한 증산법종교 교단은 이순과 순임이 모두 강일순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순임이 본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강일순 부부 사이에는 강순임 이전에도 2남 2녀가 있었으나 모두 일고여덟 살에 사망하였으므로, 강순임이 사실상 강일순의 무남독녀였다. 하지만 바로 이해에 강일순은 아내 정치순과 13년간의 혼인생활을 끝내고 이혼하였다. 증산계 종교의 경전들은 정씨 부인의 성격이 좋지 않고 시부모에게 불손하게 대하므로 부모가 강일순에게 아내를 내치라고 지시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치순이 시부모에게 불손했고 성격이 나빴는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후대의 증산계 종교에서 강일순을 옹호하고 자기네 계통의 정통성을 위하여 정치순을 부정적으로 설명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런 설명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본인은 절름발이에 시가는 가난하고 남편은 가정을 팽개치고 도통한다고 돌아다니니, 정씨 부인이 제대로 가정에 전념하고 시부모에게 순종하는 며느리가 되기를 바라긴 무리였을 것이다. 이혼당한 뒤 정씨 부인은 강일순에게 와서 몇 번이고 다시 받아들여달라고 하였지만 강일순이 거부했다고 한다. 그 뒤 강일순은 부모에게 딸 강순임을 맡기며 키워달라고 하고는 고향집을 나왔다. 정치순을 내친 뒤 강일순이 재혼하려고 하므로 맏제자 김형렬이 자신의 3녀 김말순(金末順)을 추천했다. 이때 김말순의 나이 15살. 이후 강일순은 김형렬을 제자이자 또한 장인으로 대우하였으나, 김형렬의 아내가 "이런 혼인은 인정할 수 없다." 하면서 버티는 관계로 식을 올리길 차일피일 미루었다. 비록 식을 치르진 못하였으나 강일순은 죽는 날까지 김말순을 아내로 생각하였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절대 재가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김말순은 강일순 사후 재가하나 곧 병에 걸려 죽는데, 김말순을 낮춰 보는 증산종교에서는 이를 두고 옥황상제 강일순의 말을 무시하고 재가하여 신벌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정작 강일순 본인은 후천에는 과부와 홀아비가 있어선 안 되며 누구나 나이에 맞는 과부와 홀아비끼리 결혼하리라고 했고[* 증산도 도전 5편 195장 참조. 나이가 맞는 과부와 홀아비가 크게 잔치를 벌이고 재혼해야 한다는 박공우를 칭찬한다.] 아래에 나오듯 후천에는 일부일처라고 주장한 강일순 본인부터 처를 셋이나 두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였다. 신통한 힘과 구세제민(救世濟民)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더욱 쉬운 사회상이 되었고, 강일순의 추종자 또한 증가했다. 1907년, 37살이던 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여 상황을 바꿔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퇴위하고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융희(隆熙)]]라 하였다. 이해에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을 만나 제자로 거두었다. 본디 강일순은 차경석을 제자로 거둘 의향이 없었으나 차경석이 강일순에게 반하여 끈덕지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따라다녔기에 그 고집에 져서 결국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차경석은 [[일제강점기]]에 [[보천교]] 교주가 되었다. 그 외에 박공우(朴公又, 1876-1940)ㆍ안내성(安乃成, 1867-1949)ㆍ문공신(文公信, 1878-1954) 등도 이 즈음에 제자가 되었다. ||증산종교들의 일부 경전에 따르면 강일순은 차경석을 제자로 받으면서 "네가 나를 다시 깊은 물로 끌어들이는구나." 하고 한탄하거나, 제자들과 다같이 멱을 감다가 갑자기 차경석의 다리를 붙잡고 "이무기 잡았다!" 하고 외쳤다가 차경석이 "제 다리인데요?" 하자 모르는 척 "어, 그랬냐?" 하며 놓아주거나, 갑자기 분노하여 차경석을 향해 역적 놈이라고 외치는 등, 여러 차례 차경석을 견제하는 돌발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강일순이 종종 보인 이러한 돌발행동, 기행은 평소 자신의 신비성을 높이려고 자주 사용한 방법이었으므로 제자들은 곧이곧대로 따랐다.] 그러나 이와 모순되는 기록도 있다. 차경석이 원래 [[동학]]에서 꽤 이름 높은 인물이었으므로[* [[손병희]]의 천도교에 있었다고도 하고 [[일진회]]에 있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동학]] 출신임은 분명하다.] 강일순이 처음 차경석을 받아들일 적에 수제자 김형렬 등이 "저런 흉악한 인물을 문하에 받아들이면 저희들이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하며 반발하였으나, 강일순은 "[[용]]이 물을 얻으려면 가시밭길도 가야 한다." 하면서 강행했다는 구절이 대순전경과 천지개벽경에 있다. 이런 내용에 따르면 오히려 강일순이 차경석을 적극적으로 제자로 받아들이려 한 듯하다. 천지개벽경 등의 내용은 차경석이 고집을 부리므로 강일순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는 경전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강일순이 차경석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는 내용을 믿는 증산종교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강일순은 미래를 보는 신통력으로 차경석이 어떻게 될지 이미 알았지만, 천지공사의 큰 안배에 따라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통력'을 빼고 생각한다면 (차경석의 사촌누이) 고판례와 재혼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강일순은 차경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 이렇게 보면 강일순이 차경석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구절들은 후대의 증산종교들이 보천교주 차경석을 깎아내리고자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일 가능성도 있다. 차경석, 박공우, 문공신 등은 원래 [[동학]]의 신도였다. 구세제민을 소망하며 도통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 강일순을 찾아와 모였다고 할 수 있으나, 반대로 강일순이 그런 사람들을 찾아 모았다는 해석도 있다. [[최제우]]의 못다 이룬 꿈, [[동학]]이 이루지 못한 개벽의 소망을 실현시킬 사람이 자신이므로, 동학에서 실망한 사람들을 찾아 모았다는 것이다. 강일순은 자기 가르침을 참 [[동학]]이라고 부를 정도로 [[동학]]을 강하게 의식했다.|| 역시 같은 해(1907), 강일순이 김말순과 식을 올리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다른 결혼할 만한 여자가 있느냐?" 하고 제자들에게 묻자, 차경석은 자기 이종사촌 누나 고판례(高判禮)[* 1880년 5월 5일 - 1935년 11월 1일. 향년 55세, 날짜 표기는 [[태양력|양력]]]를 추천하였다. 고판례가 남편을 사별하고 과부로 있었으므로 적당한 짝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12월 8일에 결혼하였다.[* 만약 정말로 강일순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으로 차경석을 경계하였다면, 차경석의 친척인 고판례와 결혼하였을까?] 이때 고판례 나이 27살이었다. 재혼한 이후 강일순은 주로 거처하는 장소를 전북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있는 고판례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일순의 부모가 아직 살아있었지만, 강일순은 새 아내를 데리고 고향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