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일순 (문단 편집) == 제자 == 강일순을 따른 제자 중 핵심적인 사람을 꼽는다면 김형렬ㆍ백남신ㆍ신경원ㆍ김경학ㆍ차경석ㆍ 박공우ㆍ김병선ㆍ안내성ㆍ문공신ㆍ신경수ㆍ이치복 등 11명이다. 다른 제자들도 많이 있지만 크게 강일순에게 관심을 받거나 이렇다 할 도수[* 度數. 증산 계열에서는 사명을 이렇게 표현한다. 원래는 [[동학]] 쪽에서 유래한 한잣말이다.]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정작 도수를 받았다며 한 행적들을 보면 (차경석을 제외하고) 각자 교단을 차리고 도수란 이름으로 강일순 못지 않은 기행[* 거지처럼 산다든가, 제사를 지낸다든가, 공공장소에서 고성방가를 한다든가]을 벌이며 개벽을 기다리다 죽었다. 강일순의 '''제자 [[차경석]]은 일제강점기에 [[보천교]](普天敎) 교주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순수하게 역사적인 의미로는 강일순보다 차경석이 더 중요한데, 일제강점기의 사회상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보천교의 자체 주장에 따르면 당시 보천교도는 최대 6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그 영향력 때문에 일제로부터도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았다. 보천교도들은 조선에 널리 퍼졌던 예언서들이 교주 차경석을 가리킨다는 요지로 한문 좀 읽는다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보천교 신앙촌으로 옮겨오도록 포교했는데, 개중에는 탄갈자(殫竭者)라고 하여 전 재산을 보천교에 바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탄갈(殫竭)이란 말이 힘을 몽땅 쏟았다는 뜻이다. 보천교에서는 재산을 교단에 몽땅 쏟아부었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차경석을 가리켜 차 [[천자|천자(天子)]]라 불렀음은 보천교와 차경석의 위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뿐만이 아니라 [[천도교]] 등 민족종교 계열,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도 보천교를 경계하여 비난하곤 했다. 전 재산을 바친 '''{{{#crimson 탄갈자들}}}'''과 차경석이 진행하는 '''{{{#crimson 천자 등극}}}'''이 특히 비난거리였다. 차경석은 [[만주]]에서 소나무를 수입하여 보천교 본부 안에 십일전(十一殿)이라는 건물을 세웠는데 [[경복궁]] 근정전에 가까운, 여러 가지로 건방진(?) 전각이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아무리 수행해도 강일순이 말했던 도통을 얻지 못하였다. 차경석은 점점 신앙심을 잃다가, 급기야 강일순을 기만적인 도인으로 판단하여 거부하고 새로운 교리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보천교인들은 강일순을 신앙대상으로 삼은 구파와 차경석의 변화를 따르는 신파로 나뉘어 큰 내란을 겪었다. 이렇게 일제의 압박, 내분 등 악재로 점차 교세가 약해지던 중 1936년에 차경석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증산도]] 도전은 차경석이 자신이 잘못했다고 후회하며 '입에 마약을 털어 넣고' 자살했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신문에서도 차경석이 죽었다고 했을 뿐 자살했다고는 보도하지 않으며, 2001년에 발간된 차경석 전기 ≪차천자의 꿈≫에서도 병이 심해져 사망했다고 설명한다(이 책은 가천대 박종렬 교수가 저널리스트로서 집필하였다). 증산도 도전은 차경석을 나쁘게 보이도록 최후를 왜곡했을 수 있다.] 일제는 차경석이 사망하여 보천교가 중심을 잃자마자 곧바로 보천교의 건물 등을 압수하고 유사종교해체령을 내려 당시의 잡다한 증산계 종교를 같이 해산시켰다. 이때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무극도 또한 해산됐다.[* [[광복]] 이후 조철제는 태극도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재건했다.] 그리고 보천교 건물이던 십일전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인수, 해체하여 서울로 옮겨 [[조계사]] 대웅전 건물로 삼았다. 보천교가 무너진 뒤[* 광복 후에 교단을 재건하여 지금도 보천교가 있지만, 교세는 그 시절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도 그럴 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강일순의 경우는 증산계 종교들이 주장하는 옥황상제까지는 아니어도 엄연히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는 인정하는 반면 차경석은 진짜로 "한 때의 문제 인물" 정도의 평가 외에는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의 대상을 강일순도 아니고 차경석으로 바꾼 것이니 예전의 교세를 유지할 수가 없다.] 오랫동안 증산계 종교는 그 명맥이 간신히 이어졌다. 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증산도]]와 [[대순진리회]] 때문에 강일순의 이름이 간신히 망각의 늪에서 벗어났다. 이외에는 사단법인 후암미래연구소장 차길진 법사가 보천교와 강일순을 자주 언급[[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182885&cloc=|한다]].[* 차길진의 아버지 [[차일혁]]이 차경석의 서자란 말이 있기 때문에, 차길진은 자기가 차경석의 손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차경석의 유족들은 차일혁을 배다른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또한 차길진은 차경석이 자기로 환생했다고 주장한다. 즉, 몸으로는 차경석의 손자지만 영혼으로는 차경석 본인이라는 것이다. 차길진은 칼럼에서 차경석이 독살당하였다고 여러 번 썼다. 전생에 독살을 당했기 때문에 자기가 현생에서 그 후유증으로 피를 토하고 폐 한쪽을 절개하게 되었다고...] 강일순이 데리고 다녔다는 김호연(1897-1992)을 [[증산도]] 답사팀이 만나 그 증언을 기록한 테이프를 남겼다고 한다. 증산도 교단은 김호연이 중요한 증인이라고 주장하며 도전에 김호연의 행적과 주장을 적극 반영하였다. 그런데 김호연의 증언은 강일순의 다른 제자들의 증언과 비교해도 유독 환상적이라 그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증산도 교단이 도전 개정판을 내면서 기존 증인들의 증언을 모아 구성한 이야기 사이에 억지로 김호연의 증언이나 행적을 끼워넣었기 때문에, 도전 개정판은 이야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럽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