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재구 (문단 편집) == 사후 == 1965년 10월 8일 오전 9시 30분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광장에서 육군장이 치러졌고, 태극무공훈장과 소령 계급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5년 10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51묘역에 안장되었다. 이 사례는 수류탄 투척법에 미숙하면 얼마나 큰 사고가 날 수 있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맹호부대는 부하를 아끼고 위했던 당시 대대장의 건의가 국방부의 승인을 받아 3[[대대]]의 이름을 '재구대대'로 바꾸었으며, 그의 추모 기념관까지 생겼다. 재구대대는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재구대대장을 역임한 인사로는 [[고성균]] 예비역 소장([[육군사관학교장]] 역임)이나 [[이승오]] 소장 등이 있다..] 제1 보병연대 예하 3대대에서 현재는 [[제1기계화보병여단]] 예하 제133 기계화보병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지금도 재구대대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대 마크에서 호랑이에 수류탄이 있다. 다만 호랑이+수류탄 마크는 부대마크가 아니라 전우회 마크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담당했던 10중대는 현재 제133 기계화보병대대 2중대로 바뀌었다. 133대대와 같이 133대대 2중대의 별명 또한 재구중대이다. 또한 1여단 내에는 재구공원이라는 조그마한 공원이 있는데 부대 깊숙한 곳에 있는지라. 면회하는 민간인들은 못보고 부대 개방행사 시나, 아니면 부대 방문 행사때 잠깐 가볼 수는 있다. 장병들은 잘 안가지만, 아침 뜀걸음 코스에 포함 루트여서 전 장병이 한번 씩은 공원 앞을 지나간다. 공원 주 용도는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기 위한 제사인 재구제[* 1년에 한번씩 하는 추모식이다. 이 날은 사단장도 꼭 한번씩와서 재구공원에 있는 재구상에 예를 표하고 가기 때문에 여단 장병들이 무조건 청소를 한다. 근데 사람들이 많이 안다녀서 그렇게 많이는 안 해도 되고 낙엽만 쓴다고 한다.]를 지내는 용도로 많이 사용한다. 사단 신병교육대에는 재구관이라는 추모관이 있는데, 306보충대에서 수기사로 신병 교육을 받는 장정들이 가장 먼저 입소하는 장소로 주로 많이 쓰이고, 신교대와 같은 울타리를 쓰는 기갑수색대대에 행사가 있을시에도 많이 사용을 한다. 강재구가 순직한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 성동천 부근에 그의 이름을 딴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do?cotid=41e126af-c4d8-49d3-8b2c-b75b9504e0c7|강재구공원]]이 조성돼 있고, 공원 내에 건립된 '강재구소령추모비' 앞에 보면 '강재구소령 산화 장소', '산화 지점'이라는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제11기계화보병사단]] 소속 장병들에게는 꽤나 알려져 있다.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제17보병사단]] 영내 실거리사격장의 이름도 '재구사격장'이다. 아마 강재구 소령의 출생지인 [[인천광역시]]에 주둔한 부대인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그가 생도시절 소속되어 있던 생도대 2중대의 공식명칭을 재구 2중대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사람 이름을 딴 다른 부대들이 [[광개토대왕|광개토]]1중대, [[태종 무열왕|무열]]5중대, [[문무왕|문무]]8중대 등 역사적 위인의 호칭을 딴 것과 비교할 때 강재구 소령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