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절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1920년 [[안직전쟁]] 이후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하야하고 [[쉬수정]] 등 안휘파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는 등 환계는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잃고 몰락했다. 하지만 절강성과 상하이를 비롯하여 아직까지 환계 세력들이 지배하는 세력들이 있어 환계가 그 힘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루융샹은 1915년 10사단장 겸 송호순열부사가 된 이래 1917년 송호순열사로 승진했고 1920년 절강독군에 임명되어 부유한 절강, 항저우, 상하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다시 직예군벌이 승리하고 대총통 [[쉬스창]]이 축출되고 구국회가 복구되면서 [[리위안훙]]이 다시 대총통에 취임했지만 직계가 국회를 복구한 것은 어디까지나 직계의 수령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추대하기 위한 중간단계에 불과했다. 1923년 6월, 직예군벌은 군비 등을 이유로 리위안훙을 압박하며 하야를 강요했고 분노한 리위안훙은 6월에 하야했다. 1923년 10월, 직예군벌은 [[회선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 선거를 통해 차오쿤을 6대 대총통에 당선시켰다. 이에 절강독군 루융샹은 1923년 10월 12일, 뇌물 선거로 당선된 총통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며 중앙과의 공문서 왕래를 정지시켰다. 이 소식을 듣고 [[쉬수정]]을 비롯한 환계의 잔여세력과 반직 세력들, 회선에 반대한 국회의원들이 항저우, 상하이에 집결하여 반직의 중심지가 되었고 봉천군벌, [[중국 국민당]], [[안휘군벌]] 사이의 반직삼각동맹을 형성하기 위한 중계지가 되었다. 직예군벌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위협 때문에 절강성을 놔둘 수 없을 뿐더러 직예군벌인 강소도독 치셰위안은 상하이가 강소성에 속함에도 루융샹이 절강독군으로 상하이를 통치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부유한 상하이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루융샹과 직예군벌의 충돌은 사실상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