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강절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하지만 9월 13일 장쭤린은 경봉선 열차 운행을 중단시키고 동맹인 절강을 돕겠다는 이유로 9월 15일에 산해관과 열하로 6개군, 25만 대군을 출병시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차오쿤은 9월 10일 우페이푸를 베이징에 불러들인 후, 9월 17일 우페이푸를 토역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장쭤린 토벌령을 내림으로 [[2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다. 허나 직예군벌은 와신상담하며 군대를 조련시킨 봉천군벌을 상대로 고전했으며 그동안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펑위샹]]이 장쭤린과 내통하여 [[북경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2달 만에 패배하고 천하의 패권을 내주어야 했다. 루융샹은 [[북경정변]] 이후, 1924년 10월 29일 봉천을 통해 귀국하여 12월 임시집정 [[돤치루이]]로부터 직예군무선후독판, 소환선무사(蘇晥宣撫使)에 임명되었고 돤치루이는 치셰위안을 면직, 강소성장 한국균이 겸직하게 했다. 1924년 12월, 루융샹은 선무군을 조직하여 강소군무독판에 스스로 취임하여 2차 [[제노전쟁]]을 통해 치셰위안을 축출하고 4월에 강소독판이 되었으나 8월에 남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봉천파의 압력으로 하야해야 하고 [[양위팅]]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