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제희(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만주에서의 독립 운동 === 만주로 망명한 강제희는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와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및 안동현(安東縣) 등지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8월에 일제 토벌대가 만주로 오자 관전현에서 무리를 모아 이를 습격해 창성헌병대의 헌병 1명을 사살한 뒤 도주했으며, 1919년 말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창성군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하여 보고했다. 1920년 1월 임시정부 국무령 1호에 의해 임시정부의 연락기관인 동시에 재정 조달기관인 연통제(聯通制)가 조직되자, 강제희는 그해 1월 12일 연통제에 가담해 창성군의 군감으로 임명되었으며, 창성군에서 압록강 건너 90리 거리에 있는 관전현 향로구에 창성군 임시군청을 개설하고 창성군 내에 사람을 밀파해 하부기구를 편성했다. 이때 강창을(姜昌乙)·선우황(鮮于晃)·강제은(康濟殷)·강이달(姜利達)·강용철(姜容澈)·김홍빈(金洪斌) 등 수십 명을 창성군의 연통제 조직원으로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성군 일대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했고,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 <한일관계사> 등을 국내에 배포했다. 이렇게 약 2년간 관전현과 창성군에서 활동한 그는 창성 출신 이용익의 밀고로 창성군 내 지하 독립 투쟁을 벌이던 300여 명이 체포되자 북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북만주의 한교회장(韓僑會長)이 되었고, 동녕(東寧)·목릉(穆稜)·밀산(密山) 등지에서 무장단체와 협동하여 국내 일경주재소 습격 등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이후 해방이 찾아오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김일성의 븍한건설유혹을 마다하고 그 날밤 남한으로 오게 되었다. 독립운동으로 재산을 헌납한 강제희는 군산과 울산 인천 등지에서 장사를 하며 여러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울산 국민회 지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1978년 8월 25일에 울산 울주 상북교회에서 사망했다. 원봉 강제희는 대한민국 대전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손자 강영환은 만세운동 당시 즉사한 독립유공자 [[박찬소]]의 유해발굴을 하고 있으며 강제희와 같이 독립운동 하였지만 아직 훈장이 전달되지 않은 독립유공자 문장규 등 여러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고 있다. 최근 강영환은 묘비없이 50년을 넘게 묻히신 독립유공자 이준명 애국지사의 유해를 남원에서 발굴하여 대전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준명 지사님을 모셨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8년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상훈법 개정으로 1990년 강제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위 사실들은 독립유공자 원봉 강제희의 아들 강홍주 목사가 강제희의 말씀을 받아 적어서 국가보훈처에 제공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창성군 출신 인물]][[분류:1891년 출생]][[분류:1978년 사망]][[분류:신천 강씨]][[분류:건국훈장 애국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