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화도 (문단 편집) == 역사 == 역사적으로 굉장히 유명한데, 일단 지리상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개성시|개성]])과 [[조선]] 및 [[대한민국]]의 수도인 [[한성]]([[서울특별시|서울]])과 가까우며, 양 지역의 주요 하천인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바다 쪽 출구를 막는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우선 [[몽골군]]에 항전하던 [[고려]] [[무신정권]]이 수도([[강도(고려)|강도]]江都)로 삼았던 역사가 있고, [[조선]] [[인조]]가 즉위하던 시절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청나라]] 군대를 피해 강화도로 도피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다. 이때 [[봉림대군]] 등이 인질이 되었는데, 인조로서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과 같았으며 결국 얼마 못가서 [[남한산성]]에서 항복한다. 왜란·호란 이후에는 [[강화군|강화유수부]]로 지정, 한양의 외곽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 중 하나였다.[* 그 외 유수부로 지정된 곳이 [[개성시|개성유수부]], [[광주시|광주유수부]], [[수원시|수원유수부]]였다.] 조선시대에는 강화도를 '심도(沁都)‘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구한말 조선군 편제 중, 강화도에 설치된 군영을 '심영(沁營)'이라 불렀다. 오늘날에는 심도중학교, 심도지구대 등에 이름이 남아 있다.] 또한 강화도는 [[유형|유배]]지의 상징이었다. 살려두기는 위험하지만 죽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많은 인물들을 유배를 보낼 때 강화도로 보낸 일이 많았다. [[고려]]의 [[희종(고려)|희종]]에 이어 [[조선]]의 [[연산군]], [[임해군]], [[영창대군]], [[광해군]] 등이 이 곳에 유배되었으며, [[철종(조선)|철종]]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강화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광해군은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여기에 유배시켰다가 자신도 [[인조반정]]으로 여기에 유배되었으니 인생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근현대에 와서도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가 침공해와서 벌어진 [[병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인한 [[미국]]이 강화도를 침공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했고, 우리나라가 [[일본]]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 등 하여튼 일이 많다. 강화도의 역사를 공부하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절반을 먹고 들어간다는 농담이 존재할 정도. [[6.25 전쟁]]에는 [[개성시|개성]]의 실향민들이 이 곳에 거주하면서 개성의 문화를 이었다고 한다. 덤으로 크고 작은 [[고인돌]]이 은근히 도처에 깔려 있다. 얼마나 많은지 [[고창군]], [[화순군]]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상태며 관광지로 지정되어 얼굴이 자주 팔리는 큰 녀석 이외에도, 지나가다가 밭 한가운데나 산길 옆에 고인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는 걸 보면 [[충격과 공포]]. 그게 고인돌인지 모르고 보면 그냥 굴러다니는 돌덩이로 보일 정도의 위장이 되어 있다. 관심 있는 이라면 강화 북부와 서부에 몰려있으니 그 쪽을 뒤져보자. 강화도에선 [[로마]]나 [[경주시]], [[풍납동]]처럼 건물을 지으려고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있던 도자기 등 유물들이 발견돼서 공사가 중단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게 당연한 것이 이 좁은 강화도에 무신 집권기, 즉 '''강화도 천도''' 당시 30여 개의 궁궐을 지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강화도에서 출토된 유물이 국보가 되는 사례도 있고 [[팔만대장경]]을 만든 선원사도 부지만 해도 어마어마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