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희제 (문단 편집) == 실책 == 강희제 역시 사람인지라, 단점이 전혀 없는 무결점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후계자 문제로,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후계자가 명군인 [[옹정제]]가 되었으니 잘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년에 강희제는 후계자를 끝까지 명확히 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의 유언에서야 제4황자를 후계로 삼는다는 유지를 내렸다. 물론 이는 황태자 윤잉의 주변에 몰려든 간신들과 그로 인한 윤잉의 비행, 그리고 파벌 형성을 경계한 것이지만 이 탓에 황자들의 다툼이 심해졌다는 점만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황태자 윤잉이 처음부터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강희제가 장자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만주족]]에게 익숙하지 않은 규칙을 밀어붙인[* 다만 당시 강희제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중국 지배를 위한 선택이었던 측면도 있다. 유능하다면 어떤 황족이든 차기 황제가 될 수 있는 청나라 초기의 황위 계승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 남성 황족들이 서로 자기가 더 유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청나라 황실이 혼란에 빠지고, 최악의 경우 황위 분쟁이 발생하여 청나라가 [[원나라]]처럼 일찍 중원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태자밀건법 자체가 그런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장자상속제에 대한 황족의 반발까지 잠재우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순간부터 윤잉에겐 고난이 시작된 것이고, 윤잉을 아끼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윤잉에게 고난도의 업무를 시키던 강희제의 태도는 황태자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어 [[흑화]]의 원인을 가져왔다. 그렇게 자식 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던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성공하였으나 제가(齊家)는 실패한 셈.]] 성군 이미지에 맞지 않게 [[한족]] 입장에선 폭군이나 다름없는 [[문자의 옥]] 문제도 있다. 이것 때문에 현대 들어서도 중국에서 강희제를 까는 한족 안티들이 일부 있을 정도다. 물론 현대적 기준에선 까여도 크게 할 말은 없는 정책이지만, 굳이 옹호를 하자면 강희제는 오히려 그 강도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에 속했고[* 문자의 옥은 강희제의 아들 [[옹정제]]를 거쳐 손자 [[건륭제]]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가 [[가경제]] 때부터 줄어들었다. 오히려 강희제 본인은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려 많이 노력한 편으로, 건륭제 시절처럼 말도 안되는 이유로 숙청하려고 처벌하진 않았고, 걸린 일들이 진짜 청나라 입장에선 반역자 포지션인 반체제적 성격을 많이 띄고 있었다.] 또 당시 시각에서 보면 이민족이 많은 중원을 통치해야 했던 소수민족 [[만주족]] 입장에선 [[생존]]이 걸린 문제긴 했다. 결과적으로 사상적인 측면에서 많은 통제를 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 옥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덕분에 청의 통치에 불만이 있던 많은 한족 학자들이 탄압받거나 죽어야만 했다. 강희제 말년에 벌어진 황자들 간 다툼은 당파 형성,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혼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후대인 옹정제 대에 큰 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강희제 말년의 문제들이 후세에 크게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전중기 치세에서 다져진 내실과 다음 대 황제인 [[옹정제]]의 뛰어난 정치력 때문. 옹정제는 치세 초기부터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보위를 물려받았음에도 자신의 형제들과 보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준 공신들을 숙청하여 빠르게 정국을 안정시켰으며, 거의 '''[[일 중독]]''' 수준의 정무 처리로 강희제 대부터 이어온 부정부패를 척결해나간다. 일본의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경우, 강희제가 훌륭한 황제인 건 맞지만 한편으로는 시대가 좋았기 때문에 강희제의 치세가 융성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중국의 경제가 활발한 시대이니 청조의 딸리는 군사적 능력[* 사실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이 시대부터 청은 이미 전술적으로 성과가 나쁜 경우가 많았다. 삼번의 난에서도 반군에게 고전해서 한인 병사를 모집했고, 조선에 군사를 빌리거나, 대만 정복이나 소수민족 정벌도 물량으로 보충하는 등. 사실 [[팔기군]]의 군사력이 한창 빛을 보던 초기(중원 입관 전)의 청나라도 이러한 문제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청나라가 승리한 전투인 [[사르후 전투]], [[송산 전투]], [[정묘호란]], [[병자호란]]조차도 청나라 자체의 역량만으로 이겼다기보다는 적군의 무능함에 힘입어 승리한 것에 가까웠으며, 청나라의 중원 입관 자체도 명나라의 멸망 및 [[오삼계]]의 투항에 힘입어 가까스로 성공한 것이다.]을 물량으로 보충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한족 왕조인 [[송나라]], [[명나라]]에서 크게 두드러진 바 있다. 결국 중원 입관 이후의 청나라는 군사적 능력으로 승부하던 전형적인 유목제국으로서의 면모가 사라지고, 그러한 유목제국에 비해 떨어지는 군사적 능력을 경제력으로 보충하는 한족 왕조식 체계로 바뀌어간 셈이다.], 세수가 넘치니 수탈을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빙하기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2020년대에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 사실 강희제 정책의 진짜 문제는 세금 동결이다. 나무위키나 개론서 같은 데에서야 단순하게 선정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정책이었다. 은 유입이 늘어난 호경기인 강희제 시절엔 괜찮았지만 이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도 청 조정 자체는 세수 부족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호경기의 덕을 봤다는 설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강희제는 청나라의 화기 개발을 억제하였다. 특히 1696년에 강희제는 화기의 연구와 개발을 금지시키고 이전에 만들어진 병기에 대한 서적들도 열람을 제한하였다. 왜냐면 강희제는 청나라의 군사가 승승장구한 이유는 오로지 창과 궁시에 달려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냉병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세력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염려했다는 견해도 일부 있다. 당연히 이 정책은 청나라의 화포와 총기 기술이 쇠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뒤를 이은 황제들도 강희제의 정책을 본받음으로써 결국 청나라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약화시키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아편전쟁|강희제 사후 1.5세기 뒤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출처: 훈련도감 설치 및 운영의 동아시아적 특성] [[아이러니]]한 것은 청나라의 화기를 기존의 [[홍이포]]에서 신식 화기로 바꾸어 발전시킨 인물도 강희제였다는 것인데, 이는 강희제가 화기의 중요성 자체를 망각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냉병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박하게 대한 편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만주족은 기마궁술을 [[만주어|자신들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화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한족 등 지방 세력들의 반기를 막기 위한 필요성을 느낀 것에 더해서 '''그래도 만주족이면 역시 기마궁술이지'''라는 생각으로 기마궁술을 강조한 것도 없지 않았던 듯하다. 강희제의 조부 [[숭덕제]]는 생전에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 자손들이 향락과 사치로 나태해져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잊어버리고''' 한인의 법도에 빠져드는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고, 손자 [[건륭제]]도 "우리는 건국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했다. 이러한 오래된 관습과 전통은 엄격한 노력을 통한 연습과 체득으로써 공손하게 수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불시에 활쏘는 연습장에 들러 화살을 쏘게 하기도 했다. 만주족 고관이 쓴 편지 중에는 [[나때는 말이야|옛날에는 만주족이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활을 직접 만들 줄 알았는데]]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요즘 젊은 것들은 활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들어서 한족 장인들한테 주문 제작해서 쓰더라]]라고 투덜대는 내용의 것도 있다. 건륭제 때인 [[1752년]] 황제가 예고도 없이 궁술 연습장에 들렀다가 만주족 고위 관리들이 쏜 화살이 과녁은 고사하고 땅바닥에 픽픽 떨어지는 참담한 꼴을 목격해 1년치 봉급을 벌금으로 부과하고 일부는 아예 관직을 삭탈하기도 했다고.] 그렇지만 강희제 개인의 잘못만이라기보단, 따지고 보면 100년이 넘게 화기 개혁을 할 동인도 의지도 없었던 청 황실의 문제이기는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