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희제 (문단 편집) === 동시대의 조선 정세를 평하다 === 강희제의 통치기(1661년 ~ 1722년)는 한국의 [[현종(조선)|현종]](1659년 ~ 1674년), [[숙종(조선)|숙종]](1674년 ~ 1720년), [[경종(조선)|경종]](1720년 ~ 1724년)의 치세와 일치한다. 조선에서 왕 3명이 재위할 동안 청나라는 단 1명이 훨씬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성과를 내었다. 당연히 조선의 사신들을 만난 적도 있고, 그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데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이때 강희제의 나이가 불과 16세, 우리나라 [[중3]] 나이였다.] * [[현종실록]] 19권, 12년 2월 20일 2번째 기사 강희제는 성황사[* 이 성황사(城隍祠)라는 말이 원래 성황당(城隍堂)을 가리키는 말인데, 북경의 천단을 폄하해서 이렇게 말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에 새해 인사를 드리고 온 뒤, 조선의 사신들을 [[자금성]] 건청궁으로 따로 불러들였다. 먼저 사신들을 가까이 앉게 한 뒤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국왕과 몇 촌인지, 언제 길을 떠날 것인지, 글을 읽었는지, 그리고 부사 정익(鄭榏)의 이름자를 물어본 다음에 말했다.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을 신하가 강한 소치라 한다.[* 이른바 [[군약신강]]. 다만 이무렵 조선은 [[경신대기근]]을 당한 상태긴 했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이에 복선군 이남이 대답하였다.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경신대기근|홍수와 가뭄이 잇달아 일어나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강희제는 빙그레 웃고는 시랑 중 한 사람에게 >저 사람이 국왕의 가까운 친척[* 복선군은 [[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아들이므로 현종에게는 사촌형제가 된다.]이므로 저리 말한 것이다. 라 말하고 사신들을 물러가게 했는데, 그 시랑도 함께 나오면서 역관 이일선(李一善)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그리고 사신들은 나중에 이일선으로부터 >시랑이 말하길, 사신이 황제의 물음에 대답한 말이 매우 좋았다고 하더이다. 또 가로되, 오늘 사신을 대하면서 우리나라 백성의 일까지 염려하셨고 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고 명하신 것은 다 국왕을 친근히 여기고 사신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신도 이것이 특별한 은총인 줄 아느냐고 하더이다. 라는 말을 듣고 강희제가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했다. 첨언하자면 이 시기 조선에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재앙인 [[경신대기근]]이 휩쓸고 있었다. 여기서 조선 사신에게 강희제가 "너희 나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어가고 있다더구나? 그게 다 [[군약신강]]의 나라라서 그런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 강희제가 조선의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희제와 동시기에 재위했던 조선의 임금은 현종과 숙종으로 (태종~세종 재위 기간을 제외하면) 조선 역사 중 왕권이 가장 강한 시기였다. 심지어 숙종의 경우에는 성년도 채 되지 않은 14세에 즉위 직후 바로 친정을 했을 정도. 사실 강희제가 주의깊게 본 것은 단순히 신하들의 권력이 강하다기보다는 여러차례 환국을 일으켜 신하들을 쥐잡듯 잡아 간신히 끌고 가는 듯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강희제가 말한 그 왕권이란 신하들을 패잡지 않아도 알아서 왕을 따르도록 하는 리더십을 말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에 닥친 천재지변은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군약신강이라 굶어죽은 것은 절대 아니고, 태종이 가뭄을 핑계로 처남들의 처형을 미루는 척하자 신하들이 역심을 품은 자가 있어 전지조화가 깨진 탓이라 하기도 했고, 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의 덕이 부족한 탓이니 수신에 힘쓸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청나라]]도 조선과 같은 재난을 겪고 있었다.[* 천고일제라 칭송받는 강희제의 치세이니만큼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대비와 구제가 잘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원나라]] 말부터 [[소빙하기|줄곧 하락세를 보이던 중국의 연 평균 기온은 딱 강희제 치세에 최저점을 찍고 청나라 말이 되어서야 영상으로 회복되는데]][* 劉昭民, 기후의 반역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그에 비해서 청은 상대적으로 기근의 영향이 적었다. 이는 강희제가 엄청나게 잘나서가 아니라 은의 유입이 많아지고 전란으로 인구가 줄은 덕분에 청의 경제가 기근의 영향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보는 평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야자키 이치사다. 조선을 [[군약신강]]의 나라라고 비웃는 듯한 평을 내린 것과는 별개로 [[을병대기근]][* [[경신대기근]]에 묻혀서 그렇지 [[을병대기근]]도 굉장히 참혹한 대기근이었다. [[경신대기근]] 때도 반청감정 때문에 청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조선이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말 다했다.] 때는 조선이 도움을 요청하자 쌀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조선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쌀을 보내줬다는 점에서 [[만력제]]와 비슷하지만 차이점이라면 [[명나라]] 최악의 암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과 곡식을 보내준 덕분에[* 다만 그렇다고 만력제한테 고마워하기만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이후 만주족의 성장을 사실상 방관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조선에 간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쳤기에 만력제는 절대 조선에서도 마냥 좋게 봐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에서만은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줬는데[* 물론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라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대 조선인들도 만력제가 나라 망친 암군이라는 건 인지했고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비판했다.] 비해 강희제는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일 뿐만 아니라 대기근 당시 고통받던 조선에게 쌀을 보내줬음에도 조선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희제의 할아버지인 [[숭덕제]]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엄청나게 수탈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악연이 손자 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듯하다.[* 다만 강희제를 높이 평가한 조선인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실학자 [[홍대용]]은 정조의 세손 시절,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연행 경험에 대해 묻는 세손에게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였다."고 극찬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5/2020050500047.html?outputType=amp|여담으로 해당 구휼미의 경우 청나라 기록에서는 옥처럼 흰 쌀로 구제하였다고 나오고, 조선의 기록에서는 먹을 수도 없는 썩은 쌀이었다고 나오는데 강희제 성격상 먹을 수 없는 썩은 쌀을 구휼미로 줄리는 없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조선의 기록이 거짓으로 보인다.]]] 그래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하면 강희제의 조선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굉장히 유화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병자호란|할아버지 시절의 조선 침공]]은 통역관들의 [[오역]] 때문이었다는 [[뇌피셜]]까지 읊어댔을 정도로. 또한 [[대만]] 정벌 시기 [[동녕 왕국]]에서 상국으로 받들 것이니 독자적인 통치를 인정해 달라고 청해왔는데, 대신인 나라 밍주가 제후국인 조선의 예를 들어 찬성하자 그와의 대화에서 조선은 언어와 풍속이 달라 중화와 융화될 수 없어 그대로 놔뒀지만 대만은 우리와 풍속이 같으니 그럴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만약 강희제가 조선에 대해 유화적이지 않았다면 당시 조선의 반청감정은 실제보다 더더욱 강해졌을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