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희제 (문단 편집) === 동시대 각국의 군주들 === 강희제의 치세 중 유명한 타국 군주는 [[프랑스 왕국|프랑스]][* 별명이 유럽의 중국이었다.]의 '태양왕' [[루이 14세]](재위 1643년 ~ 1715년)[* 실제로 [[루이 14세]]는 강희제에게 [[선교사]]와 더불어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651|서신]]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강희제는 이를 받지 못하고 300여년이 지난 후 [[루브르]] 박물관에서 공개되었다고.]와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대제]](재위 1682년 ~ 1725년)가 있다. 동시기 청나라에 이어 2위 인구대국인 [[무굴 제국]](1526년 ~ 1858년)의 황제는 무굴 제국 전성기의 마지막 시기의 군주이자 동시에 무굴 제국 몰락의 시작을 열어버린 [[아우랑제브]](재위 1658년 ~ 1707년)다. 일본의 경우에는 [[에도 막부]](1603년 ~ 1868년 / 265년)의 쇼군은 4대 [[도쿠가와 이에츠나]](재임 1651년 ~ 1680년)부터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재임 1716년 ~ 1745년) 까지 모두 5명이 거쳐갔다. 조선의 경우 역대 조선 국왕들 중 가장 강한 권력을 향유한 왕으로 유명한 [[숙종(조선)|숙종]]의 재위기간(1674년~1720년)이었다. 묘하게도 강희제 치세 기간은 동서양에서 특히 왕권이 강한 군주들의 재위 기간과 많이 겹친다. 이들의 재위기간도 대부분 길다. 당시 청에 머물던 [[선교사]]들에 의해 강희제의 통치는 유럽까지 알려졌고, 나폴리 동부 대학에는 '중국 학회'까지 세워진다. 유럽의 학자들은 '철인 군주'를 꿈꾸던 [[플라톤]]의 이상을 [[기독교]]도 안 믿는 중국에서 실현했다면서 [[유교]]와 기독교와 연결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다만 유교와의 연결점을 찾는 학풍은, 이보다는 선교와 연결되어 이루어졌다. 즉 어느 날 갑자기 "너희들이 생각하던 건 다 틀렸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공맹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설득력이 있다.", "공맹께서 하신 말씀의 이러이러한 부분이 그리스도교의 말씀과 같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도 배척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게 훨씬 중국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 이러한 경향을 '보유론(補儒論)'이라 하는데 명나라 시대의 예수회 선교에서부터 나타난 경향이며, 훗날 조선에서 특히 많은 공감을 받았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 보편적 논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쪽이 훨씬 와닿는 설명이기도 하고.] 의외로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Gottfried von Leibniz).. 물론 그 환상은 열강이 청에 직접 발을 내딛으면서 무참히 깨지고 말지만. 참고로 강희제 본인은 서양 열강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는데, 선박들이 해외로 팔려가고 목재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고 [[네덜란드인]]들이 남해에서 버티는 모습을 보며 연해 지방의 총독들을 만난 자리에서 '''"[[백년국치|미래에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 때문에 중국이 곤경에 처할까 염려된다.]] 그것이 걱정이다", "이것이 짐의 예측이다"'''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정도면 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