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로왕 (문단 편집) === 뒤늦은 구원 === 한편 앞서 탈출했던 부여문주는 [[나제동맹]]에 따라 신라로 도망가서 [[자비 마립간]]에게 증원군을 요청, 신라 구원병 10,000명을 이끌고 오지만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한강 유역이 통째로 [[고구려]]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허나 문헌에 따르면 이후 백제가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회복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돌궐]] 발흥 등 국제 정세의 변화, 백제의 중흥과 맞물린 결과다. 아차산 일대와 자양동 한양 아파트 부지에 고구려가 세운 보루 유적이 많으며, 가장 처음 발견된 구의동 유적이 자양동 한양 아파트 부지에 있었다. 고고학 자료에서도 고구려는 서울 [[몽촌토성]], 성남 창곡동 및 판교동, 화성 청계리, 안성 도기동, 대전 월평동 등 유적이 드문드문 확인되고 있어 제대로 된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약 30년 만에 다시 이루어진 서울 조사에서는 고구려가 몽촌토성을 남진 기지로 활용한 모습이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은 1980년대 단편적인 조사에서 고구려 건물지와 토기가 확인되었고 2014년부터 조사된 바에 따르면 고구려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도로를 구축한 후 다수의 건물을 지었던 것과 다량의 고구려 토기가 확인되고 있다.] 이 '''신라로부터 온 지원군이 백제의 귀족 지원군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다만 이에 대해 당시 귀족들과의 사이가 나빠서 그랬다고 추정하는 건 무리다. 이 당시 신라는 백제가 아신왕 때 고구려한테 빼앗겨버린 충북 지역 일부를 손에 넣어 거의 왕실 직할지에 가깝게 육성했었는데, 당시 한성으로 올려보낸 병력은 바로 이 지역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11~13권 참조] 근초고왕 때에 영산강 유역 세력 등 전남 전체와 전북 일부를 직접 지배 세력으로 편재하지 못했음에도 일단 전부 간접 지배 지역으로 편성하긴 했었고, 그 이후에도 딱히 적대적인 정황은 문헌적으로든 고고학적으로든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오히려 개로왕 통치기에는 흔히 백제의 부흥기로 알려진 근초고왕 통치기보다 전북의 직접 지배 지역이 늘어나 있었고, 개로왕 자체가 워낙에 '''중앙 귀족들 원성을 사가면서 지방 세력들 위무에 전력 투구했기에 이 반독립적인 전남 호족 세력들이 그 당시 대놓고 백제를 배신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다만 아무래도 위급한 상황에서 충청도에서만 병력을 모아갈 순 없었던데다 전남의 반독립적인 호족 세력으로부터 병력을 빨리 징발해 올리긴 어려워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전남에 마지막으로 남은 옛 마한 계열 소국들이 전부 백제의 직접 지배지로 병합되는 건 [[동성왕]] 대에 백제가 탐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동성왕~[[무령왕]] 통치기로 추정되며 고고학적으로도 그렇게 해석되는 견해가 주류다.][* 한편 백제 부여씨 왕실과 지방 세력 간의 충돌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던 건 과거의 학설이다. 의외로 가장 나중에 편입된 옛 침미다례 일대, 즉 전남 서남부 영산강 유역에서 백제계 유물이 더욱 많이 발굴되었다. 또 이 지역이 웅진백제 초기에는 왜 및 가야 세력까지 끌어들이면서까지 상당히 비협조적으로 나와 백제 왕실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건 동성왕~무령왕 시기 일단락되었다. 무령왕 통치기의 백제가 개로왕 때보다 줄어든 영토를 가진데다 신라의 도움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황해도까지 거침없이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무령왕 당시 백제가 '''전남 전체의 직접 지배화'''에 성공하여 해당 지역의 인력과 물자를 그때보다 더욱 수월하게 징발하여 효율적으로 편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거론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