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로왕 (문단 편집) == 평가 == [[고구려]]의 [[도림]]과 관련된 설화적 기록 때문에 [[암군]]의 [[이미지]]가 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이 설화적인 기록을 가지고 도림을 프로 파일링했을때 백제를 잠입하기 위해 여러해를 거쳐 준비한 정황들로 봐서는 도림이 개로왕을 가스라이팅했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의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하기도 했고, [[북위]]와 연계하여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해 외교적으로도 안간힘을 쓴 점도 있다. 개로왕은 당시 왕권을 과시하고자 해 큰 궁을 짓고, 지방 호족들도 위무하는 등 별 짓을 다했으나 당시 [[대성팔족]]을 비롯한 [[귀족]] 세력의 반발이 거셌고, 결정적으로 장수왕의 공격 크리가 터지면서 망하게 된 것이다. 개로왕 시기에 [[공주]] 지방 세력들이 [[위례성]]은 고구려와 가까우니 [[수도(행정구역)|수도]]를 안전한 [[공주시|웅진]]으로 옮기자고 여러 차례 [[PR]]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넘어가자 [[문주왕]]이 공주로 옮긴 것인데 이에 대한 증거는 [[수촌리 고분군]]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쳐들어왔을 때 문주를 피신시키면서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서 죽겠지만 너는 살아서 나라의 계통을 이어야 한다"며 한성에 끝까지 남았던 점이나 개로왕이 피신시킨 문주가 백제의 다음 왕으로 즉위하면서 수도 한성을 잃은 백제가 아주 [[멸망]]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냥 암군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실 공주로의 천도도 그냥 막 할 선택은 아니었다. 후세 사람인 우리야 결과를 알고 있으니 어차피 함락될 것 미리 공주로 천도했으면 좋지 않았겠냐고 하지만, 공주 같은 충남 내륙 지역은 직접 지배지로 편입된 역사만 따지면 오히려 [[김제시]] 같은 전북 서해안보다도 약간 늦었었다. 그리고 직접 지배지로 편성되었더라도 일단 [[천도]]하면 토착 [[호족(한국사)|호족]]들에게 기득권을 양보해야 하는데, '''안그래도 너무 지방 호족들만 챙긴다며 중앙 귀족들에게 눈흘김 받던''' 개로왕이 적어도 그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그 문주왕마저도 이미 결과가 다 정해진 시점에서조차, 폐허가 된 위례성에서 무려 한 달 동안 공주로의 천도를 결단내리지 못하고 괴로워 했었을 정도. 무엇보다 공주는 과거나 현대나 심각한 용지 부족에 서쪽으로는 첩첩산중으로 교통로 개설도 어렵고 [[금강]] 수운의 활용에도 제약이 상당해 도시로서의 입지는 꽝에 가깝다. 결국 백제는 웅진 천도 63년만에 사비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훗날 [[의자왕]] 이후 [[백제부흥운동]] 과정과 비교하면 문주가 개로왕의 명으로 도망칠 수 있었음은 큰 행운이었다.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추대된 [[풍왕]]은 [[왜]]에서 오래 [[인질]] 생활을 했는데 [[장남]]도 아니고, 의자왕에게서 합법적인 루트로 정통성을 인정받지 않은 상태였기에 정통성 측면에서 다소 취약했다. 이런 이유로 풍왕이 거국적인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다소 부족했던 것과 달리 문주는 왕이 되기 전에는 [[상좌평]]으로서 개로왕을 보좌해 실제 국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문주는 개로왕이 직접 "너는 부디 살아남아서 나라의 계통을 이으라"고 문주의 [[왕위]] 계승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풍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통성이 있었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바둑]]에 빠져서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한다.[* [[알까기]]를 하다가 [[군대]]를 말아먹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강조(고려)|강조]]와 함께 잡기를 경계하는 이야기로 손꼽힌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연 바둑 때문에 나라를 말아먹었는지 의문이 든다. 도림은 "…성곽과 궁실은 수리되지 않아 방치되어 있고 [[비유왕|선왕]]의 해골은 빈 들판에 가매장 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범람하는 강물에 무너지니…"라고 말했다. 궁과 선왕의 능을 축조한 것 외에 성곽을 축조하고 [[한강]]변을 따라 둑을 건설하게 한 것 등은 백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이었고,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궁과 능을 증건한 것 역시 단순한 [[사치]]라기보다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경우에도 후자의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사실 ([[도림]]이) 고구려 사람인 것을 속일 수 없잖아요. 사투리 때문에, 지금보다 사투리가 10배는 심했을 거에요. "제가 백제 사람입니다." 라고 하지는 못하고, "고구려에서 지금 죄를 짓고 도망왔다." (라고 했을 거에요.) 굉장히 높은 지위여야 (백제)왕하고 놀 수 있겠죠? 다만 반역죄 정도로 튀었다고 이야기 했을 것이고, 그 전에 [[고구려]]의 [[장수왕]]대에 내전이 났으니까 "[[도림]]이 아마 장수왕의 반대편에 있었나보다." 하고 판단했을 거에요. (…) 그럼 백제에서는 뒷조사를 했을 거 아니에요. 그 결과 개로왕이 도림을 믿게 되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아마 개로왕은 고구려의 정세를 듣기 위해서 도림과 함께 했을 수도 있어요. 사실 뭐 바둑을 좋아했겠어요? 서로가 서로의 정세를 보기 위해서 그랬겠죠.''' >----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史]] 45부 삼국시대1 - 한강을 점령하라 中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장수왕]]이 귀족 세력을 [[숙청]]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개로왕이 고구려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명문장으로 유명하며 《[[동문선]]》에도 실려 있다. 결국 개로왕은 힘에 부쳐서 고구려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지 도림의 꼬임에 빠져서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선대]]부터 워낙 명군이 된 감이 있으며 국경을 지키던 장수인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고구려로 투항한 것도 컸다. 투항 후 급하게 국경으로 다른 장수들을 보냈지만 야전 사령관이 둘이나 이탈해서 투항했으니 군의 사기야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장수왕이 침공했을 때 문주가 구원군을 요청하러 간 곳이 백제의 지방이 아니라 [[신라]]로 갔다고, 그 당시 백제가 지방에서 지원군을 전혀 얻지 못했을거란 결론은 근거가 없다. 그보다는 가장 빨리 정예병을 지원받을 수 있었던 곳이 당시 신라가 고구려를 몰아내고 차지했던 충북 일대 군사기지였던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주가 신라군만 데리고 와서 싸웠던 게 아니라, 적어도 한 달 동안 고구려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는 백제군도 주력의 일부였다. 이렇게 된 건 지방 [[호족(한국사)|호족]]들이 협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로왕이 개성 일대에서 먼저 고구려를 막는 것보다 한강 왕성 방어선을 더욱 중시하는 잘못된 군사 전략을 수립한 것이 주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참조] 그리고 이렇게 잘못된 군사 전략이 도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또한 지적된다. [[아신왕]]이 생각이 모자라서 강원도 [[영서]]와 충북 일대는 고구려한테 남겨두고[* 물론 때문에 하마터면 웅진백제가 나중에 개로왕 시즌2 찍을 뻔 했지만 그건 나중 일] 어떻게든 모든 수를 다해 개성까지만 확보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시사점 - 장수왕의 고구려가 아주 독한 맘을 먹고 전력을 퍼부어서 위례성을 함락시켰다는 것. 바로 강 건너에서 신라-백제 연합군과 함께 있는 문주를 고구려군이 무려 한 달 동안이나 그냥 지켜볼 수밖엔 없었던 걸 보면[* 이 군세까지 고구려가 대파하였다면 이후 나제 동맹의 우주방어는 불가능했다.], 고구려가 비록 위례성을 함락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전력 소모가 만만찮았던 것으로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