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성시 (문단 편집) == 개요 == [[북한]]의 [[특별시#s-3]], [[군사분계선|휴전선]] 인근 지역 최대 도시이다. 2019년 이후로 행정상 도와 같은 위계의 도시가 되어 어느 도에도 속하지 않게 되었다. 북쪽은 [[황해북도]][* [[금천군]]과 [[토산군]]과 경계를 이룬다.], 동쪽은 북한령 강원도[* [[철원군(북한)|철원군]]과 경계를 이룬다.], 서쪽은 [[예성강]]을 경계로 [[황해남도]][* [[배천군]]과 경계를 이룬다.]와 접해 있다. 바로 남쪽에 [[군사분계선|휴전선]]을 경계로 남한의 [[경기도]] [[파주시]], [[연천군]]이 있으며 한강 하류를 건너 [[김포시]], [[인천광역시]] [[강화군]]과도 인접해 있다. 원래 과거엔 [[장단군]]이 동쪽, [[개풍군]]이 서남북쪽에 있었다. 허나 1960~70년대 장단군이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파주시, [[연천군]]에 임시 편입되어 일단은 지금까지 개성시와 파주시가 맞붙은 형국이 되었다. 물론 파주시청은 한참 아래쪽에 있고, 바로 근처엔 [[대성동(파주)|대성동 마을]]이 있다. 1951년 이전에는 '''[[경기도]] 개성시'''로 [[대한민국]]의 실효지배 영토였다. [[고려시대|고려 왕조]]의 전체 사직 474년 중 [[중세]]시대 434년간 '''고려의 [[수도(행정구역)|수도]]'''였다. 초반 1년의 철원 시기(918~919년)가 있었고 [[몽골]]침입으로 38년간 피난으로 임시수도였던 강화 천도 시기 (1232~1270년)가 있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던 때 1년간의 남경 임시 천도 시기(1382~1383년, 1390~1391년)가 있지만 우왕과 공양왕대 기간의 날짜를 모두 합쳐도 1년이 채 안 된다. 고려 당시에는 서울(수도) 경(京)자를 써서 '''[[개경]]'''(開京)이라 불렸다. 과거 [[소나무]]가 많아 '''[[송악]]'''(松岳/松嶽) 또는 '''[[송도]]'''(松都)라는 별칭이 있다. 송(松)이 소나무가 아니라, 고려의 수도로서 수도를 의미하는 [[서울(동음이의어)|서울]](솔)의 음차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궁예]]의 수도 [[철원]](鐵原, 쇠벌, 서라벌)도 마찬가지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 개성이 1930년 개성부로 [[개풍군|개성군]]에서 분리되기 전까지는 개성군 송도면으로 개성군의 중심지였다. 아무튼 이래저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근교의 옛 수도인 [[톨레도]]와 [[거리]]나 [[위상]]이나 모두 비슷하다. 1945년 9월 11일, 개성 시내에서 미군환영대회와 미소접촉이 열리면서 [[https://youtu.be/97pya-HDJig|#]] 1950년까지 [[대한민국]]이 통치하였지만 [[6.25 전쟁]]을 거치면서 [[속초시]], [[설악산]], 김일성별장 ([[화진포]]&산정호수), 대붕호([[파로호]]), 양구 두타연계곡 및 펀치볼(가칠봉), 양양 [[하조대]]와 [[낙산사]], 금성천 이남의 [[김화군]]을 비롯한 철원평야를 되찾아온 대신에 [[한강]]&[[임진강]] 하구, [[연백군]], 옹진반도, [[함박도]]와 함께 상실하여 (빼앗겨서) 신해방지구로 [[북한]]에 편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김포국제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북녘땅까지 직선거리로 30km에 불과할만큼 [[서울특별시]]가 분계선에서 더 가까워지는 문제를 낳게 되었다. 대한민국 통치시절 [[만월대]]가 있는 자리에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한국 통치령이지만 [[삼팔선]]에서 가장 가까웠던 도시였기때문에 38선 이북에 주둔하던 [[소련군]]들도 자주 놀러오기도 했으며, 이 당시 찍힌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이 개성에서 종종 [[주한미군]]과 [[소련군]]이 만나서 친목질을 하는 모습이 많이 찍혀있다.]. 만약 한미연합이 개성시 & 개풍군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더라면 신도시와 공단 개발로 [[김포시]] + [[파주시]] ([[탄현면]]) + [[강화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서울과 인근 지역의 과밀화를 어느정도 해소하고 [[송악산]]에 [[황해도]] 지역을 내다보는 통일전망대가 설치되었을 것이다. 물론 한강하구의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하여 경인 아라뱃길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삼팔선]] 시절에도 최전방 지역인터라 시가지에서 [[대한민국군]]과 [[조선인민군]] 간에 크고작은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5.4 송악산 전투) [[서울특별시]]에서 도로편으로 60~70 km면 닿을수 있고 개성공단에서는 [[우리은행]] 개성지점이 운영되기도 하였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도끼만행]]에 이어서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아웅산 테러]]에 격분한 군당국이 비밀리에 개성탈환을 검토하기도 하였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강하게 중단시켜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horror&no=61846|#]] 남한과 인접한 도시라는 점에서, 남북관계가 진전됐던 2000년대부터 [[개성관광]](2007~2008)이 시행되었고, [[개성공단]]도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개성이 북한 내에서 잘사는 도시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개성공단은 [[이명박 정부]]때까지 계속 가동되다가, [[박근혜 정부]]로 넘어온 2013년 가동중단이 됐다가 다시 복구됐으나, 결국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2016년 다시 가동이 중단]]된 이후 현재까지 재개가 되지 않고 있다. 이후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다시 남북관계가 진전되면서 2018년 4월,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남북정상회담]]의 결과인 [[판문점 선언]]에 의해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성 지역에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 6월,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사무소를 폭파]]해버렸고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인구]]는 30~35만 명(2008년 통계)으로 추정된다. 근교의 농촌지대의 인구를 합친 숫자로, 시가지 인구는 15만~19.2만 명(2008년 통계) 정도로 추정된다. 남한의 [[구리시]]와 비슷하다. 과거 개경의 면적은 25~30㎢로 추정되며, 1950년 당시에는 17개 동에 면적은 29.95㎢였다.([[구리시]](33.3㎢)보다 약간 작다) [[1950년]] 전쟁 당시만 하더라도 개성시의 시역은 개성 외성과 거의 일치했다. 거의인 이유는 개성시 동쪽 방면(운학동, 덕암동 일부) 쪽은 개성시 영역이 나성 바깥으로 삐져나온 곳이 있어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