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성특별시/역사 (문단 편집) === [[6.25 전쟁]] === 결국 [[6.25 전쟁]] 개전 초기에 북한군 제6사단이 비밀리에 [[철도]]를 수선한 후 [[열차]]에 탑승하여 돌격하는 바람에 함락당했다(…)는 설이 있어 논쟁 중이다.[* 철도 수송설은 한국 전쟁 서적중 가장 유명한 데이비드 햄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도 소개되었다. 또한 저명한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톨랜드의 서적에서는 거의 정설로 쓰여져 있다.] 그 후에는 [[인천 상륙작전]]으로 수복하였으나 [[1.4 후퇴]] 때 다시 북한에게 넘어간 후 1951년 3월 UN군의 커레이저스 작전(Operation Courageous)의 결과 UN군이 잠시 수복하였으나 곧바로 개시된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다시 빼앗겼다. 전열을 정비한 UN군이 다시 반격을 가하여 전선을 개성 근방까지 올려놓았으나 개성은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황 속에 1951년 6월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시작했고[* 회담장소를 개성에서 약간 남쪽으로 떨어진 [[판문점]]으로 옮긴 것은 고도(古都) 개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산군 측에서 의도했다는 설이 있다. 휴전 협상 지역은 유엔군의 작전 지역에서 제외되었기에 북한 측은 개성 지역을 확실히 점령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던 것.(출처: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개성을 놓고 협상이 벌어졌다. 유엔군은 '''공산군이 개성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산군은 거절하였다. 공산군은 후술하는대로 오히려 38선 시절의 원상 복귀를 주장했다. 유엔군사령부는 끝내 개성을 공산측에 양보하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휴전선이 개성 남쪽을 지나는 바람에 현재는 북한 영토가 되었다.''' 개성은 그냥 도시가 아니라 고려시대 시절 한민족의 수도였던 곳이며, 당시 [[대전광역시]]보다도 더 큰, 현재 기준으로 보면 광역시에 해당하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도시규모상으로만은 이 전쟁에서 남한 측이 손해를 봤다. 반면 당시 동부 전선에서는 [[원산]] 이남까지 밀고 가기 위해 일단 [[고성군(강원도)|고성군]]의 거진읍을 점령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렇게 전쟁 초기보다 동부 전선이 상당히 올라가자 휴전 회담에서 북한은 전쟁 이전의 영토, 즉 [[38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UN군]]은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전쟁 전과 같이 개성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을 것이지만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며, 싸워서 쟁취한 강원도 북부 지역이 다시 북한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승만]]은 상징성 높은 도시인 개성을 잃은 것을 상당히 분통해하여 개성의 반환 없이는 휴전도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내비치기도 했다는데, 이승만은 애초에 휴전 협상 자체를 파토내려고[* 이승만이 진정 원했던 것은 '''완전한 통일'''이였다. 이 때문에 휴전 자체를 반대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군이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혹여 북한이 다시 침공해오면 이번엔 미군이 확실히 돕겠다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벌인 적도 있을 만큼 휴전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였으니 이 주장은 조금 의문이 가는 구간이다. 다만 굳이 휴전하려면 상징성 높은 개성이라도 확보해달라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도 개성, 연백, 옹진의 영유권을 휴전 이후 꽤 오랫동안 주장했다.[* 그건 [[이북 5도]]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정부차원에서 [[1957년]]정도까지 지속적으로 각종 궐기대회를 조직하거나 항의를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휴전 직후 신문기사에서 개성시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이런 기사이다.] 함락 이후에도 [[경기도청]]에서도 임시로 개성시청을 두기까지 했던 듯 하다.[* 물론 현재도 [[이북 5도]] 위원회에서는 북한 치하의 모든 도·시·군·읍·면·동의 장(長)을 계속 임명하고 있다.] 참고로 한국전쟁 직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옹진군(황해남도)|옹진군]], [[연백군]]의 국회의원들은 1953년 휴전 이후 자신들의 지역구를 상실하였음에도 그 임기와 직책, 지역구를 다음 총선이 있는 1954년까지 그대로 유지하였다. 또한 원래 개성 시내에 있었던 서울지방법원 개성지원, 서울지방검찰청 개성지청은 휴전 이후 파주군 아동면(현 [[파주시]] [[금촌동]])으로 이전해와 '개성지원', '개성지청'이란 이름을 1962년 8월까지 그대로 유지하다가, 1962년 9월 1일 각각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현 [[의정부지방법원]]), 서울지방검찰청 의정부지청(현 [[의정부지방검찰청]])을 신설하면서 이에 통합해 폐지했다. [[https://uijeongbu.scourt.go.kr/jibubmgr/history/new/HisList.work?pageIndex=5|의정부지방법원 연혁]] [[http://www.spo.go.kr/site/uijeongbu/05/10502000000002018102506.jsp|의정부지방검찰청 연혁]] 이후 1976년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휴전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서해안 부분을 정리하기 위하여, 현재도 간간히 언급되는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령의 회복, 그리고 개성의 탈환을 충분히 고려하기도 했지만 실행하진 않았다. 끝내 개성은 북한 치하로 넘어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