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성특별시/역사 (문단 편집) === 당시 건축 === [[파일:external/www.koreanhistory.org/1086326604.jpg|wide=100]][* 가장 바깥의 성이 [[나성]](羅城), 서북쪽에 있는 눌리문 - 광화문이 있는 성이 [[황성]](皇城), 내[[제석원]]이 있는 작은 성이 궁성(宮城)이다.][* 중부와 북부를 감싼 회색으로 되있는 성은 우왕 ~ 공양왕 대에 추가로 지은 성이다.] 주요 건축물인 '''[[만월대]]'''[* 만월대는 조선시대에 붙은 이름으로, 당시엔 특정 명칭이 없고 단지 본궐, 정궁 등으로 불렸다.]를 세운 것은 왕건 즉위 직후인 919년이다. [[http://blog.naver.com/unigaeseong/120031395214|개경의 당시 모습]] [[여요전쟁]]으로 파천 당시 크게 피해를 입은 이후 [[강감찬]] 상원수의 건의로 1029년([[현종(고려)|현종]] 20년)에 외성(外城)인 '''[[나성]](羅城)'''을 축성했다. [[왕가도]]가 장정 24만명과 기술자 8천여명과 현종 즉위년부터 20년간 쌓았으며, 현종 당시 성안의 관아 및 민가들은 5부(동, 서, 남, 북, 중) 35방 344리였다고 한다. 1011년, 현종은 '''[[황성]](皇城)'''을 쌓아 궁성 - 황성 - 나성 체제를 완성시켰다. 황성은 천자만이 지을 수 있는 성이다.[* 동시에 서경에도 황성을 세운다. [[장락궁]] 문서 참조.][*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제후국을 자처했기에 황성이 없다.] 개성 시가지를 지형조건에 맞추어 조성했기 때문에 질서정연한 바둑판식 정(井)자형 도시와는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당나라]]의 장안성, [[신라]]의 [[서라벌|금성]],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 [[헤이안 시대]]의 [[교토|헤이안쿄]]와 같이 질서정연한 형태의 도시구조가 아닌 풍수지리적인 자연스러운 도시형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북송]]의 수도 역시 [[운하]]로 둘러싸인 [[카이펑]]이었으니 중세 수운에 걸맞는 수도라고 할 만하다. 다만 후대의 [[한성부|한성]]이나 송의 카이펑과는 달리 수도 바로 인접 지역에는 큰 강이 없었던 게 당대에도 약점으로 여겼던 듯.[* [[예성강]], [[임진강]]이 동서로 지나기는 하나 시가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 반면 한양은 위의 두 하천보다 넓은 '''[[한강]]'''이 지척에 위치하여 수운에서는 유리했다.] 여러 전란에도 지금까지 이때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개성남대문]], [[선죽교]], [[만월대]]터, [[공민왕릉]], 박연폭포, [[송악산]] 등. 개성 남대문 외에도 내성에는 동대문, 동소문, 서소문, 북소문, 진언문 등 6개의 성문이 더 있었는데 문루는 대개 없어지고 남대문만 [[1954년]]에 복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