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신교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신성 로마 제국)]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는 개신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 당시 1517년부터 나온것은 아니다. 당시 [[마르틴 루터]]는 돈을 받고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 판매에 대항하여 [[95개조 반박문]]을 교회 문에 붙이며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가 1520년 가톨릭 교회의 파문, 1521년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의 추방령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도 가톨릭 교회는 물론 루터나 루터의 지지자들까지도 분열이 일시적인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몇 년후에야 실질적인 개신교회의 설립이 이어졌다. 가톨릭 교회 개혁을 주장한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은 기존의 교회를 개혁하는 입장에서 가톨릭교회의 전통에 성경적 의문을 제기하고 교회전통보다 성경을 우위에 놓으며 전통보다는 성경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자를 자처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로마교회의 전통으로 변질된 초기 기독교를 회복하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크리스천이라는 생각이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 자체는 1529년 [[신성 로마 제국]]의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부터 등장했는데 마르틴 루터의 복음주의에 찬성하고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6개 제후[*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요한(1468)|요한]], [[헤센]] [[방백]] [[필리프(헤센)|필리프 1세]], [[호엔촐레른 가문|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 [[하노버 왕국|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에른스트와 하인리히 형제, 안할트-쾨텐의 볼프강.] 와 14개 제국도시[*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울름]], [[콘스탄츠]], [[린다우]], [[메밍겐]], 켐텐(Kempten), [[뇌르들링겐]], 하일브론(Heilbronn), 로이틀링겐(Reutlingen), 이스뉘(Isny im Allgäu), [[장크트갈렌]], 바이센부르크(Weissenburg), 빈츠하임(Windsheim).]의 대표들이 "Verbum Dei manet in æternum(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리라)"이라는 구호를 소매에 적으며 등장하자 이들을 제국의회에서 가리켜 라틴어 ''Protestantes''에서 따와 항의자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기존 종교개혁 입장의 루터와 루터 지지자들이 가톨릭교회와 황제의 이단선고에 반발하여 1520년 루터와 지지자들에게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이 내려졌고, 세속적으로는 1521년 보름스에서 열린 신성로마제국회의에서 제국의회 구성원 400여 명의 대다수의 의사를 무시하고 가톨릭교회와 황제가 루터파에게 제국추방령을 내렸지만, 황제 카를 5세가 1526년 1차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 대(對) 튀르크 전쟁협조와 과세를 위해 기존 추방령을 번복하고 새로운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 조치를 제한하며 공의회에서 루터파가 주장하는 교회 개혁 문제를 다루기로 하였는데, 카를 5세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며 강화하자 다시 이전 결정을 번복하여 루터파에게 제국추방령을 다시 때렸고, 신교도 제후와 제국도시들은 이 결정에 항의했다. 루터파 제후들과 제국도시는 루터와 루터파에 내려진 제국 추방령도 적법절차에 따른 공소가 아니어서 무효이며[* 카를 5세는 1519년 황제 선거시의 공약과 1520년 대관식 때 재차 서약하여 적법한 절차가 아니면 제국추방령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후속 조치 또한 당연히 무효라고 항변한 것. 이들은 또한 자신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인으로 절대 이단이 아닐 뿐더러, 세속적으로 여전히 황제에게 충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529년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 직후, 1530년에는 루터파 교회에서 루터파 교리선언에 해당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을 제출하고, 기존 교회와 교인들에게도 공존을 요구하였지만 황제와 가톨릭교회 세력이 다수 의석을 장악한 제국의회에서 거부당했고, 교회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한편 14세기 중반 160여 년 전 현재 개신교와 유사한 기존 가톨릭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이 잉글랜드에서도 있었는데 [[존 위클리프]]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가톨릭 교회에선 롤라드파(Lollardy)라 불렀었다. 롤라드는 '중얼거리는 자'라는 뜻으로 이들이 성경을 외우고 다니는것을 미친놈 취급한 비하어였으며, 1517년부터 가톨릭 교회 개혁을 주장한 루터에 찬성한 세력들을 지칭하는 루터파란 용어도 '''이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며 루터를 믿는 이단'''이라 하여 'Lutheran' 즉 '루터 추종자'라 불렀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하에서 나온말은 맞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속된 말이다. 반대로 루터파에선 기존 가톨릭교회를 기독교가 아닌 로마추종자, 교황추종자(Papist)라고 비하했다. 개신교에서는 대체로 16세기 이후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며 제2경전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종파들을 통칭해서 개신교라고 부른다. 또한 개신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들도 역시 개신교라고 불린다.[* 다만 여호와의 증인과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는 더 이상 본인들을 개신교로 부르지 않고, 개신교계에서도 이들을 개신교의 일원으로 처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독립적인 회복주의 교파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기원 자체가 서방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기독교 종파들의 집합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재에도 어디까지가 개신교 종파인가?"라는 합의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파[* 현재 [[루터교회]]의 전신(前身)], 칼뱅파(츠빙글리)[* 현재 개혁교회/[[장로교회]]의 전신(前身)], [[재세례파]][* 현재 [[침례회]]의 전신(前身)], 잉글랜드 국교회[* 현재 잉글랜드 [[성공회]]의 전신(前身)] 같이 현재는 아무런 문제 없이 개신교로 함께 구분되는 종파들 모두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서로를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로 여기지 않았고, (물론 가톨릭을 대하는 정도 만큼은 아니지만) 서로 반목했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의 표면적인 공통점이라면 로마 교회에서 이단 선고를 받았다는 점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 전체를 겨냥한 종교재판, [[마녀사냥]][* 16세기 후반 가톨릭 [[예수회]]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주도로 [[스페인령 네덜란드|스페인 치하 베네룩스]]와 프랑스내 스페인령, 남독일과 [[폴란드 왕국]]에서 개신교도 색출을 위한 마녀사냥이 성행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교황청에서 모든 로마 교회의 종을 울리며 기념주화까지 찍어낼정도로 [[바오로 4세]]가 매우 기뻐했다. 이런 반응은 오히려 개신교의 결집을 가져와 종교갈등이 더 심화되었다.], [[30년 전쟁]] 등을 겪으면서 루터파, 칼뱅파, 잉글랜드 국교회(잉글랜드 성공회)는 비로소 로마교회에 대항하는 공동의 신앙을 가졌다고 여기게 되어, 가톨릭에 대항한 일종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특이할만한 점은, 루터파, 칼뱅파, 잉글랜드 국교회가 로마교회에 대항해서 서로 연합을 하던 당시에도, 제세례파(현재 침례회의 전신)는 이들 모든 교파로부터 배척당했다. 유아세례는 의미가 없으므로 "세례를 다시 줘야한다"는 주장은 로마교회/루터파/칼뱅파/잉글랜드 국교회 모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해괴한 말로 생각되었다. 결국 훗날 재세례파의 다수는 믿음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후 침례교가 된다. 현재 미국에서 침례교 교인은 전체 인구 중 25%로, 제일 큰 기독교 교파이다. (그 다음으로 큰 교파가 오순절교회로 전체 인구의 8%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미국 내 침례교의 교세가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개신교의 정체성은 16세기경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교회의 미신적 악습이라 보는 요소들을 극복하고, 성경에 충실한 '바른 교회'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도 개신교는 '오직 성경'을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삼으며 이는 교회조직의 전통과 성경을 동등한 위치에 놓는 가톨릭·정교회와의 큰 차이점이다.[* 이는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에서 반대 입장의 큰 논거다. 가톨릭 교회에서 전통을 근거로한 교리를 하나라도 철회 할 수 없다고 미리 선포했기 때문.] 같은 개신교 내부에서도 전통에 대한 시각은 다르다. [[루터회]]나 [[성공회]]는 기독교 전통 가운데 성서와 충돌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인정하는 반면에, 개혁주의 계통에선 성서에 언급되지 않는[* 특히 [[성상(조형물)|성상]]이나 [[스테인드 글라스]] 등 시각적 요소는 개혁주의에서 가장 혐오하는 요소이다.] 전통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측면이 강하다. 크게 기독교를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면,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서방에 속한다. 가톨릭과 사이는 둘째치고 서방교회에서 갈라져 나갔기 때문에 동방교회인 [[정교회]]보다 가톨릭 교회와의 신학적 공통점이 많다. 동서방 교회의 신학적 논점에 대해선 거의 모두 가톨릭 입장과 일치한다. 애초에 마르틴 루터가 신학적으로 교조로 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역설적으로 루터가 자신의 신학적 롤 모델로 삼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가톨릭교회의 윤곽을 잡은 인물이다.] 또한 서방교부로 가톨릭 교회에서 정통으로 여기지만 정교회에선 그다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10세기 경에야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동방에 소개되었지만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