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황력 (문단 편집) == 집필 == 남아 있는 기록이 책 제목과 내용 두세 줄이 전부이기 때문에 집필자가 누구인지, 집필 시기는 언제인지에 관해 말이 많다. 가락국의 멸망(532년)부터 개황력이 인용된 가락국기의 집필 시기(1075년 경) 사이의 언젠가 집필된 것만 확실하고, 그 외는 알 길이 전혀 없다. 이에 여러 설이 나왔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6세기 중반 [[진흥왕]]대 설 진흥왕이 [[황룡사]][* 노란 용은 대개 [[황제]]를 상징한다.]를 지을 즈음, 신라의 '자존의식'이 높았을 당시, 가락국을 정벌한 다음 가락국 사람들에게 신라국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국사(신라)|국사]]를 편찬하며 동시에 개황력을 편찬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이 의견에 의하면 가락국은 신라에게 자진하여 투항하였는데, 이 때문에 가락국을 우대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추가적으로 가야 통합에 대한 명분도 삼을 수 있었다. (유우창) 그러나 가락국의 후예가 실질적으로 정치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시기는 이보다 후대인 [[김유신]]이나 [[문명왕후]]가 있던 시점이므로 타당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남재우) * 서기 581~600년 설 중국 [[수나라]] [[문제(수)|고조]]의 [[연호]] 중 개황이 있는데, 이 무렵인 서기 581년 ~ 600년에 쓰여졌다는 설. 이 해석대로면 [[금관가야]] 멸망과 신라 편입 이후 [[신라]] [[진평왕]] 시대쯤에 각 나라의 역사서가 쓰여지던 시점에 함께 쓴 책이라는 것이다. (미시나 쇼에이, 조인성 등) [[주보돈]]은 6세기 후반이라면 신라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있을 시절인데 중국과 아무 상관없는 가야사를 서술한 책에서 수나라 연호를 굳이 이 책 이름으로 사용할 이유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 7세기 중후반 설 제목의 개황(開皇)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황국을 열었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경우이다. 이는 [[금관가야]]를 [[황제]]국으로 높여 썼다는 말인데, 신라 사회에서 왕가도 아닌 [[김해 김씨]]들이 자기들 옛날 선조 얘기에 저런 거창한 표현을 썼다는 점에서 금관국 후손들의 위상이 가장 높아진 시점, 즉 [[김유신]]이 전쟁영웅에 오른 시점부터 [[삼국통일]]의 열기가 아직 가시기 전인 [[7세기]] 중후반에 쓰였다는 해석이다. ([[주보돈]], 백승총 등) 이에 여러 근거가 있는데, 가령 [[허왕후]]의 '왕후'라는 표현이 신라 중대에 자주 사용되던 것으로 보아 [[문무왕]] 즈음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김태식), 가야계 후손이 정치적으로 절정에 달했고 금관소경을 설치하기도 한 [[문무왕]] 전후 시기라는 주장(남재우), [[문무왕]]이 본인의 외가를 높이기 위해 수로왕을 신라의 [[종묘]]에 합사시킨 적이 있는데, 이 즈음 편찬된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도 있다. (선석열) 그러나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서 인용한 김유신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김수로가)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중국 신화)|소호]](少昊)의 직계'라는 내용이 있어서, 신라 중대 즈음부터 소호금천씨 출자설이 대두된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존재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 비문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적었는데, 여기서 개황력을 인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유우창) * 8세기 후반 [[혜공왕]]대 설 [[삼국유사]]에 의하면 779년(혜공왕 15년) [[김유신]] 묘에서 일어난 회오리 바람이 [[미추왕릉]]으로 들어간 후, 능 속에서 김유신과 미추왕의 대화가 들렸다. 김유신이 '신은 일평생 신라를 위해 싸웠는데, 지난 경술년(770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었다[* [[혜공왕]] 때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 당한 일을 말한다.]'고 읍소하자 [[미추왕]]이 '나와 공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어떡하겠냐, 전처럼 다시 힘써달라'고 말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신라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며 무열왕계가 단절되고 김유신의 가문이 [[김흠돌의 난]] 등으로 인해 몰락하게 되었는데, 이 내용이 설화적으로 실려 있는 것이다. 이에 가문의 후손들이 본인들의 가문의 복권과 정통성 주장을 위해 집필했다는 설이며, [[김유신행록]]이 이와 같은 이유로 같은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영식 등) * 나말여초(10세기 전후) 설 신라의 통제력이 무너진 나말여초([[후삼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에서 신김씨 후손들이 과거의 왕손임을 강조하려 썼다는 의견이다. '개황(황제국을 열다)'과 같은 도발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후삼국시대 ~ 고려 초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다. (정중환 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