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창군부인 (문단 편집) == 생애 == [[1487년]](성종 18년) 3월, [[성종(조선)|성종]]에 의해 [[세자빈]]으로 정식 내정되었으며 11세가 되는 다음해인 [[1488년]](성종 19년) [[1월 26일]], 동갑내기인 [[연산군]]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된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빈례를 거행하고 [[세자빈|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간택 없이 책봉된 첫 사례이다. [[갑자사화]] 당일 남편 [[연산군]]이 시아버지 [[성종(조선)|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때려 죽이고 장검을 뽑아든 채 [[정현왕후|자순대비]]의 처소로 쳐들어가자, 신씨는 이를 뒤쫓아가 남편 [[연산군]]을 극구 말리면서 [[자순대비]]를 구원하였고 의붓며느리 덕분에 다행히 [[정현왕후|자순대비]]는 안도할 수 있었다. [[1502년]](연산군 8년),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의 [[연산군일기]] 기록을 보면, "신씨는 [[만삭]]이라 친상 중이지만 [[고기]]를 못 먹게 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아예 거애(곡하는 것)도 못하게 막아버린다. [[만삭]]인 만큼 유산하거나 신씨의 건강이 상하는 것을 우려해서였던 것 같다.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805029_003|#]]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가는 처지의 남편 [[연산군]]을 모시기 위해 자신도 그와 같은 유배지로 보내달라며 울부짖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대신 [[거창 신씨|친정]]이 있는 사저로 보내졌다.[* 여담으로, 나중에 폐위된 [[광해군]]의 경우 아내 [[문성군부인]] 류씨와 함께 유배되었다.] 남편 [[연산군]]이 죽고 난 후 그의 신주를 직접 모신 것으로 추정되며, 시동생인 [[중종(조선)|중종]]에게 [[강화도]]에 묻혀있던 [[연산군]] 시신을 양주 해촌으로 이장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중종(조선)|중종]]은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때 [[조선/왕사|왕]]이자 이복형이었던 [[연산군]]의 시신을 거두어 양주 해촌에 이장하게 했다. 다만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매우 비참한 말로를 겪었고 전부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8명의 자식들 중 4명은 아기 때 죽었고 1명은 유산되었다. 남은 3명 중 폐세자 이고와 창녕대군은 왕자라는 이유로 살해되었고 휘신공주는 딸이라 살아남았지만 1524년에 구문경과 휘신공주의 묘를 세웠다는걸로 보아 이 무렵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폐비 신씨는 1537년에 사망하였다.] [[1521년]](중종 16년) 11월, '빈(嬪)'의 예우와 함께 속공[* 屬公. 임자가 없는 물건이나 금제품, 장물 등 관부로 넘기던 일을 말한다.]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