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신앙 및 종교 정책 === 건륭제는 정통 중화의 천자라는 입장에서 [[유교]] 또는 [[성리학]]을 깊이 신봉했다. 특히 신하들한테 충성을 강조하면서 과거 [[명나라]]의 신하였다가 [[청나라]]한테 항복했던 전겸익(錢謙益)[* 명나라의 대신이자 학자였고, 한 때 [[남명]] 정권에 가담하였으나 [[홍광제]]가 청나라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청나라 군대를 찾아가 항복하였다. 그래서 그와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은 전겸익을 배신자라고 무척이나 미워하였다.]을 가리켜 "글재주는 있었지만 지조가 없었으니 입에 담을 가치조차 없다. 그가 쓴 책은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라고 혹평하면서 이신전(貳臣傳)이라는 문헌을 만들어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했던 신하들을 비난하였다.[* 출처: 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117쪽. 조선으로 치면 조선 중후기 이후로 역성혁명을 주도한 [[정도전]]이나 [[계유정난]]을 주도한 [[한명회]] 등이 역적 또는 간신으로 규탄되고, [[최영]], [[정몽주]] 등 [[고려]] 말기에 끝까지 고려에 충성하다 죽어간 인물들이나 세조를 제거할 모의를 하다가 모두 처형된 [[사육신]]이 높이 평가받은 것과도 비슷하다.] 그리고 명나라 사직을 위해 만주족이나 이자성군과 싸우다 전사한 명나라 충신들에게 대거 시호와 벼슬을 추증하고, <흠정승조순절제신록>을 펴내 이들의 충절고사를 기록했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삼은 원나라 황제의 후신인 몽골의 대칸을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륭제는 [[티베트 불교]]의 신자이기도 했다. 만주족 왕은 대대로 [[문수보살]]의 현신으로 자처했으며,[* [[만주]]라는 명칭도 [[문수보살]]의 [[음차]]라는 주장도 있다.] 건륭제를 문수보살로 묘사한 티베트 불교의 [[탱화]]도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예수회 소속이었던 카스틸리오네였다. [[https://asia.si.edu/object/F2000.4/|#]]] 티베트 불교의 지주인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삼고 북경에 모셔와 법론을 듣기도 했다. 건륭제는 늙어서는 불상을 모으는 취미를 가져 금불상을 사들이거나 궁정에서 직접 주조하기도 했다. 부처님을 묘사한 도자기나 그림, 조각에 본인이 직접 글씨를 남긴 작품도 여럿 전한다. 대체로 강희와 옹정은 도교를 이전 왕조만큼 대접했지만, 건륭제는 도교를 탄압했는데, 도교와 불교가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옹정제가 병환에 들자 도사가 바친 금단을 먹었는데 효과가 없이 옹정제가 죽자, 건륭제는 도교에 깊은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고도 한다. 건륭제는 강희 시절부터 부침이 있을지언정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자라왔기 때문에 서양 문화에 대해서 관심은 제법 있었으나 이를 개인적 취향이나 사치가 아닌 국가 과학 기술, 문화 예술 부흥으로까지 개방하는데에는 무관심했고, 서양이 중국에 퍼뜨리려고 한 기독교, 특히 [[가톨릭]]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금지령을 내렸다.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를 기용한 강희제처럼 건륭제 역시 [[예수회]] 수사인 화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등의 서양인 측근을 일부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들은 겉으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고 황제의 개인적인 공부에 있어서만 도움을 줬기 때문에 무사했으며, 카스틸리오네를 따라온 천주교 북경교구의 수사들도 건륭제의 개인적인 취향 덕에 오랫동안 방조와 묵인 하에 지하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청나라에 드나들던 조선 역관과 상인들이 북경의 '천주학' 서적을 입수하여 조선에 들여와 연구하다 스스로 신앙의 차원으로 천주'교'인이 된 것 역시 이 시기. 허나 가톨릭은 강희제 시절 중국에서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비난하는 전례문제를 일으킨적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이에 민감하게 대응했고, 그리하여 강희 이래로 청조는 천주교 박해를 이어갔으며 건륭제 역시 1746년 금교령을 내림과 동시에 이를 어기고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마카오로 추방하고 중국인 신자와 사제들은 전부 신강을 비롯한 사막 오지로 유배보냈다. 문제는, 건륭제가 북경의 선교사들을 개인적 취향[* 사실 개인적 취향이 아니어도 청나라는 서양인들에게 흠천감 역법 담당이나 엔지니어링, 통번역 같은 일부 업무를 전담시켰기 때문에 역법 등의 필수불가결한 업무를 위해서라도 서양인 선교사들을 꼭 거느릴 필요가 있었고, 변발이나 만복 착용 등의 문화적 규율에까지 기꺼이 협조하는 이들 '서양 스님'들을 구슬리기 위해 고액의 급여와 사생활 존중 등의 당근을 금하지 못했다. 이들 수사들은 이렇게 존중받는 사생활의 영역에서 사적으로 재산을 불리는척 부동산 자산을 늘려 소작농, 상인, 수공업자 등을 중심으로 신자 수를 늘렸고, 마카오에서 북경 밖의 타지로 벌이는 선교사업에 있어서도 도움을 줬다.]으로 거느리면서 국가정책으로는 천주교를 금한다는 [[내로남불]]적인 입장을 표하다보니 지방 총독, 순무, 포정사부터 최말단 지현까지, 그리고 주방팔기 군인들까지 이에 대해 입장이 제각기 따로놀았다는 것. 어떤 지방관들은 조정 관료들의 가족들도 입교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에 따라 지방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더러는 선교사들로부터 보호비 성격으로 뇌물을 뜯거나 도리어 자기 식솔들이 몰래 세례를 받아서(...) 적극적으로 은폐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지방관은 건륭제의 금교령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여 서양인 신부를 하느님 나라로 보내버리자 건륭제에게 칭찬을 받아 승진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번은 포르투갈이 명나라 때부터 깃발을 꽂아놓아 청나라가 함부로 손댈 수 없던 (잘못 건드리면 아편전쟁이 반세기 일찍 터질 수도 있는 위치인) 마카오까지 청나라 광동의 지방관들이 쳐들어가 단속을 벌이자 서양인 신부들이 대폭발하여 성당 앞에 뛰쳐나와 "불쌍한 신자들은 냅두고 내 머리를 가져가라! 순교자가 되어 천주님의 곁으로 가겠다!" 하며 뻗대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오히려 천주교인들은 [[백련교]]를 비롯한 사이비 종교와 혼동한 사람들이 사교를 믿고 역적질을 꾀하는 무도한 서양인들을 고발한다고 관청에 신고하다 정체가 드러나는 일도 잦았는데, 이 경우에도 지방관의 자비에 따라 운명이 크게 갈리곤 했다. 다만 [[러시아 정교회]]는 강희제와 옹정제 시절부터 중국 선교의 자유를 얻어 중국에 신학교를 세우고 포교하고 있었고, 청나라와 별로 마찰을 빚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