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아내 === '''[[효현순황후|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 [[1712년]] 출생 ~ [[1748년]] 사망 * 황장녀 [[1728년]]~[[1729년]] * 황2자 단혜황태자 영련(永璉) [[1730년]]~[[1738년]] 영련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옹정제가 지어준 것으로 璉자에는 이어지다라는 뜻이 있다. 건륭 원년에 밀건법으로 황태자에 임명하였다. 영련이 죽자 건륭은 슬퍼하며 무덤을 성대하게 만들었다. * 황3녀 고륜화경공주 [[1732년]]~[[1791년]][* 1745년 몽골 과이심부 좌익중기 찰살극 달이한친왕 색포등파륵주이에게 하가. 참고로 달이한친왕가는 [[효장문황후]]의 남동생인 박이제길특 만주습례가 창설한 가문으로 할아버지 박이제길특 반제는 순치제의 양녀이자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의 손녀인 고륜단민공주와 결혼하며 아버지인 나복장곤포는 강희제의 이복동생 유친왕 복전의 딸과 결혼한다. 실제로 건륭제는 이 딸을 매우 아껴서 결혼 당시 북경에 민가 200채를 허물면서까지 공주부를 지어준다. 이후 남편인 달이한친왕이 준가르와의 전쟁 중 과실로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음에도 한 번 용서해 주었으며, 공주가 죽은 후에는 공주와 그 남편의 무덤의 격을 능으로 올려준다.] * 황7자 화석철친왕 영종(永琮) [[1746년]] ~ [[1747년]]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났는데 가뭄이 오래 지속되었다가 마침내 단비가 내렸다고 하며 태어나자 마자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천연두로 요절하게 되며 친형이 안치되어있는 단혜황태자원에 안치되었다.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건륭제도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효현순황후는 성정이 어질고 소박했으며 태후에게도 효성스러웠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다. 한번은 건륭제가 크게 앓은 적이 있는데 쾌유한 뒤에도 어의는 "반드시 100일은 푹 쉬어야만 원기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당부했다. 황후는 매일 밤 건륭제의 침실 밖에 거주하면서 정성을 다해 100일 동안 시중을 든 뒤에야 비로소 합방했다.[* 출처: 옌 총니엔 저, 대청 제국 12군주 열전.] 하지만 효현순황후는 건륭 13년에 지방 순행 중 [[더저우]] (德州)에서 죽었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그 지역에는 건륭제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의 개혁 성향이 이즈음부터 크게 꺾이고 본인은 천자 놀음에 더 신경 쓰면서 제국은 슬슬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런데 건륭제는 이 황후의 남동생인 푸차 푸헝(富察 傅恒)의 부인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야사가 있다. '''[[계후 호이파나라씨|계황후 호이파나라씨]](繼皇后 輝発羅拉氏)''' [[1718년]] 출생 ~ [[1766년]] 사망 * 황12자 다라패륵 영기(永璂) [[1752년]]~[[1777년]] * 황5녀 [[1753년]]~[[1753년]] * 황13자 영경(永璟) [[1755년]]~[[1757년]] 수녀 선발에 참여했다가 [[옹정제]]의 눈에 띄어 보친왕 왕부의 측복진(첩)으로 들어왔다. 당시 보친왕부의 여자들은 적복진(훗날 효현황후) 부찰씨와 측복진 고씨(훗날 혜현황귀비) 말고는 모두 격격이었는데 휘발나랍씨는 바로 측복진으로 들어왔다. 왕부에 들어온 시첩 가운데 [[완귀비 진씨]]와 함께 제일 어린 편이었고, 제일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측복진이 된지 9달만에 보친왕이 건륭제로 즉위해 후궁이 되었다. 건륭제 즉위 후 ‘우아할 한’의 봉호를 받고 한비(嫻妃)에 봉해졌으며, 이는 효현황후와 귀비 고씨에 이어 서열 3위의 위치였다. 후에 귀비(嫻貴妃)로 올랐다. 효현순황후가 죽고 난 뒤 곧바로 황귀비로 육궁을 통솔하게 되었다. 이 과장에서 건륭제는 휘발나랍씨에게 전례를 깨뜨리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첫 황후의 죽음 이후 황귀비(嫻皇貴妃)에 봉해져 황후 대리로 육궁을 통솔했다.[* 책봉문마다 “자애로운 태후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문구가 있어 태후픽으로 승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후가 된 호이파나라씨는 일가가 [[만주족|만군]] [[팔기제|팔기]] 상삼기인 정황기로 승격되었으며, 건륭 사이에서 아이를 연이어 셋이나 낳으며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건륭 30년 남순 중 미스터리하게 북경으로 돌려 보내지고, 총애를 잃은 채 냉대를 받다가 죽게 된다. 심지어는 죽고 난 후의 장례 절차마저도 황귀비의 예에 따라 치르도록 건륭제가 명령하였으며, 건륭제는 슬퍼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친자인 황12자만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건륭은 황후가 화를 내며 머리를 잘랐다며, 머리를 자른것은 부모나 남편이 죽었을 때나 하는 행동인데, 이는 매우 큰 불경이라며 황후를 유폐한 이유를 말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총애를 잃은 이유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있으며,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뒤끝이 장난아니던 건륭제는 계황후가 그려진 초상화를 모두 태우거나 얼굴을 고쳐 그렸으며, 계황후에 대한 처사가 부당하다는 대신들 역시 파면되거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유일하게 장성한 황12자 영기 역시 죽고 나서야 동생 [[가경제]]에 의해 패륵으로 추존되었다고 한다. '''[[효의순황후|효의순황후 워이기야씨]](孝儀純皇后 魏佳氏)''' [[1727년]] 출생 ~ [[1775년]] 사망 * 황7녀 고륜화정공주 [[1756년]]~[[1775년]][* 1773년 찰살극 외몽고 새음약액부 중좌익 말기 친왕(a.k.a 초용친왕)박이제길특 납왕다이제(1754~1816)에게 하가. 참고로 납왕다이제의 할아버지인 고륜액부 책릉(1672~1750)은 강희제의 10녀인 고륜순각공주와 결혼하였으나 1723년 [[준가르]]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옹정제]]는 책릉의 작위를 고산패자에서 친왕으로 올려준다. 참고로 납왕다이제와 화정공주는 6촌 간이다. 이후 납왕다이제는 1803년 가경제 피습사건 당시 가경제의 목숨을 구해 더욱 총애를 받는다.] * 황14자 영로(永璐) [[1757년]]~[[1760년]] * 황9녀 화석화각공주 [[1758년]]~[[1780년]][* 1780년 화석액부 오아 찰란태에게 하가. 참고로 오아 찰란태의 왕대고모는 [[효공인황후]]이다. 효공인황후의 조카손자인 우야 자오후이는 건륭제 당시 준가르 정벌전에서 큰 공을 세워 공작 작위를 받았다.] * 황15자 [[가경제|인종 가경예황제]] 영염(永琰) [[1760년]]~[[1820년]] * 황16자 영선 [[1762년]]~[[1763년]] * 황17자 화석경의친왕 영린(永璘) [[1766년]]~[[1820년]] 한족 출신인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a/af/Empress_Xiao_Yi_Chun_%28%E5%AD%9D%E4%BB%AA%E7%BA%AF%E7%9A%87%E5%90%8E%29_at_the_time_being_the_Imperial_Consort_Ling_%28%E4%BB%A4%E5%A6%83%29.PNG|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위씨]]를 총애하였다. 청나라는 기인 중에서 후궁을 뽑고 상삼기 포의 중에서 궁녀를 뽑는데 위씨는 정황기 포의 출신이라 처음에는 궁녀였을 것으로 본다. 건륭의 눈에 띄어 건륭 10년 귀인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하여금 영(令)’의 봉호를 받고 영빈으로 오르고 4년 뒤에 다시 영비로 오르는 고속 승진을 했다. 황7녀, 황14자를 낳은 후 건륭 24년에 귀비에 봉해졌다. 계황후가 유폐된 후 황귀비(令皇貴妃)로 승격되어 육궁을 다스렸다. [[황후]]가 될 수 없었던 한족으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황제에게 큰 총애를 받아 황7녀 고륜화정공주를 시작으로 해마다 아이를 출산했다. 역대 청나라 후비를 통틀어 제일 아이가 많다. 건륭 치세 후반기에 낳은 아이들은 거의 효의순황후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그러나 거듭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49세에 훙(薨) 하였다. 이후 건륭제가 그녀의 아들인 황15자 영염에게 선위하여 [[가경제]]가 된다. 그녀는 사후 남편인 건륭제가 직접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로 추증해주었으며, 성씨에 ~가(佳)가 붙여져[* 만주족 성씨에는 ~가(佳)씨로 끝나는 성이 많아, 한족을 만주족으로 편입시킬 때는 성씨 뒤에 가(佳)를 붙여 승격시켜주었다.] 일가가 만주족 팔기에 편입된다. 효의순황후가 죽은 뒤 비빈 중 가장 연장자였던 서비 예허나라씨와 유비 커리예트씨가 육궁을 관리했지만 그마저 죽은 뒤로 내명부는 건륭이 완전히 다스리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