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청나라.png|width=100%]]}}} || || '''{{{#FFD700 청의 최대 강역[* 빨간 선은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동쪽의 [[흑룡강]] 이북 땅과 [[연해주]] 지역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에 의해 [[러시아]]에 귀속되었고, [[외몽골]]은 1921년 [[소련]]에 의해 독립하였다.] }}}''' || 건륭제의 치세는 할아버지 [[강희제]], 아버지 [[옹정제]]와 함께 '''[[강건성세]]'''[* 원래는 강옹건성세라고 해야 하겠지만, 옹정제의 재위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도 있고, 묘하게 옹정제는 전통적으로 [[폭군]]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평가가 박했다.]라고 불리며 청나라 최대 전성기로 여겨졌고, 음습한 느낌에 내치에 주력한 아버지 옹정제의 치세와 달리 건륭제는 정복 전쟁이라는 화려한 군공도 세웠기에 오랜 시간 고평가를 받았다. 건륭제가 청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힌 것은 본인도 "십전노인"으로 자화자찬하는 최대의 업적이다. 이것은 준가르부를 멸망시킨 부산물로 얻어진 것인데, 건륭제는 [[명나라]] 때부터 역대 중국왕조에 골치를 썩이던 [[준가르]]([[오이라트]])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 '''멸족'''을 결정했다. 요새 말로 하면 [[학살자]]라 할 수도 있는데, 건륭제는 출진하기 전에 준가르가 명나라 때부터 이어져 온 중국의 골치거리였고,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변명했다. 실제로 준가르와 그 전신인 오이라트는 [[북로남왜]]에서 알 수 있듯이 명나라 시절부터 [[감숙성]]과 [[섬서성]] 일대를 약탈과 노예납치로 어지럽혔고, 청나라는 처음에는 조선이나 내몽골처럼 군신관계로 복속시켜 이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준가르는 '''입조와 배신을 반복하면서''' 청나라의 신경을 긁는지라 건륭제는 아예 씨를 말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준가르부는 청나라는 물론 주변 민족[* 티베트, 위구르, 카자흐, 키르기스, 몽골족 모두 준가르를 증오하고 있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족]]은 티베트 불교를 믿던 [[준가르]]가 가장 탄압하던 민족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준가르는 체왕 랍탄 시절 포탈라궁을 불지른 일로 티베트인들에게도 원성을 들었다.]에 성상납 강요나 노예 납치 등 여러 원한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준가르족을 돕거나 퇴로를 열어주지 않았다.[* 비슷한 케이스로 오이라트족의 일파가 오늘날 러시아의 [[칼미키아]] 일대로 이주하면서 원주민인 [[노가이 칸국|노가이족]]을 학살한 사례가 있는데, 노가이족의 경우 이웃 국가들이 퇴로를 열어주어 전멸은 피했다.] 게다가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몽골-금 전쟁|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부와의 23년간의 전쟁 끝에 멸망하고]] 여진족들이 대거 학살당했던 것도 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건륭제는 준가르부가 멸족되어 공지가 된 지역에 타림분지 서쪽에 있던 [[카자흐족]]과 남쪽의 [[위구르족]]을 불러 살게 했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인도적으로는 매우 비난받을 일이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준가르가 여러 민족의 원한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에는 어쨌든 청나라 백성뿐만 아니라 주변 민족들은 준가르부 멸족을 기뻐했고[* 위구르족과 외몽골 부족들은 청나라의 준가르 원정을 도왔다. 청군이 중원으로부터의 보급로가 수천킬로미터에 달하는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 민족들이 청군의 편을 들어 보급을 도왔기 때문이다. 다만 청군에 일찍 항복한 준가르의 부족들은 [[팔기군]]으로 편제되어 멸족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건륭제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외몽고]], [[일리 강|일리]]를 중국의 영역으로 들여온 것은 바로 건륭제의 업적이다. 청나라 고유영토였던 만주에다가 명나라 영토를 더했던 강희제 시대의 청나라 영토에서 40% 정도를 늘려놓았다. 다만 일리는 러시아에 잃어버리고, 외몽고는 이후 분리 독립한다. 이런 확장이 지금에 봐서는 엄청난 전비 지출 및 이후 점령지 관리 비용 증가로 청나라의 멸망의 한 원인이 된다고 보기도 한다.[* 준가르 멸족의 경우는 국방비 절감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라서 이런 비판이 합당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베트남과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 국가들과의 분쟁은 특별한 성과 없이 막대한 전비만 낭비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어떤 대제국도 이러한 확장 후에 쇠퇴가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건륭제 개인의 오판이나 실책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영웅사관적 관점이다. 건륭제가 여러모로 강희제나 옹정제보다 사치를 좋아하고 과시욕이 강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건륭제의 사치는 주로 서화나 도자기와 같은 예술품을 모으는데 사용되었으며, 도로나 운하를 보강하는 인프라 공사를 많이하긴 했지만, 진짜로 국가재정에 무리를 줄 수 있는 사치성 토목공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건륭제가 추진한 사치성 토목공사는 [[이화원]] 정도가 있고, 건륭제 시절의 청나라 1년 재정의 1/10정도인 480만냥 정도를 들였다. 다만 이것은 물이 부족한 북경에 저수지를 건설해서 물공급원을 확충하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에, 사치로만 보기는 힘들다.] 당시 청나라의 재정은 세금을 계속 깎아줄 정도로 철철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에, 건륭제의 사치때문에 청나라가 쇠퇴했다는 주장은 [[침소봉대]]나 다름 없다. 또한 이런 건륭제의 과시욕과 수집욕이 옹정제의 금욕적 정치와 비교되기는 하지만, 옹정제식의 독재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중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옹정제 자신이나, 그 신하들의 피로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결과적으로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보다도 훨씬 단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건륭제가 재위 초창기에 아무 생각 없이 신하들을 방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옹정제가 태묘에 같이 가자며 신임했던 장정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장정옥은 옹정제 시절 혹사를 당했고, 건륭제가 재위에 오르자 계속 건강을 핑계로 사직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고, 건륭제시절 장정옥은 낙향하고 다시 부름을 받아 출사하기를 반복했다. 그 밖에 건륭제가 할아버지 강희제를 본받아 강남순방을 하면서도 할아버지와는 달리 백성들에게 비용을 징수, 강남을 황폐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건륭제는 총 6차례에 걸처 강남을 순행했는데, 준가르부 토벌이 마무리된 청나라 중기부터는 청나라는 재정이 풍족하여 건륭제는 오히려 가는 곳마다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그 이유는 강남에는 반청감정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토닥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출처 중국어 위키백과 [[https://zh.wikipedia.org/wiki/%E4%B9%BE%E9%9A%86%E5%B8%9D%E5%8D%97%E5%B7%A1|건륭제남순]]] [* 단 세금 감면은 미봉책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이같은 순행 의도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청나라는 강남(현재의 절강성, 강소성, 안휘성) 보다도 훨신 더 서쪽의 호북성에서 발발한 [[백련교도의 난]]과 그 남쪽의 광동성에서 벌어진 [[태평천국의 난]] 때문에 큰 멸망 테크를 걷게 된다.] 건륭제 시절까지만 해도 청나라 조정은 늘어난 재정을 주체를 못해서[* 강희제 중기인 1685년 3100만냥이던 청나라 세수는, 옹정제 시대 (1725)년에는 3500만냥, 건륭제 중기인 1766년에는 4800만냥까지 늘어났다. 건륭제는 감세정책을 폈고, 건륭제 말기 1791년에는 4300만냥으로 줄어들었다. [[https://www.sohu.com/a/279136812_99979077|#]]] 계속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을 폈고, 막대한 무역흑자를 볼 수 있는 서방과의 교역도 매우 꺼릴 정도로 재정이 풍족했다. 건륭제 시절 전대인 강희제나 옹정제보다 민생이 어려워진 것은 건륭제의 원정이나 사치로 인한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의 폭발적 증가 때문으로, 강희제 초에 1억5천~2억에 불과했던 청나라 인구는 건륭제 말기가 되면 3억에 달해서 100년만에 인구가 두배로 뛰었기 때문이다. 아래 나오는 황무지 사업이 옹정제 시절보다 지지부진한 것은 이미 옹정제 시절 농사 짓기 좋았던 땅들은 모두 개간되었고, 건륭제 시절에 남은 땅들은 거의 쭉정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래에 일부 재중 선교사들의 견해로 중국에 대한 평가가 서양에서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정작 서방 전체에서는 당시만 해도 중국은 동쪽에 있는 최강대국이었다. [[가경제]] 시기에 [[프랑스]]의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만 하더라도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마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에서 당시 중국에 대한 평가가 드러난다. 중국의 쇠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던 시기는 건륭제나 가경제 시기가 아니라 그 다음인 [[도광제]]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재정이 박살나게 된 원인은 가경제 초기(실질적으로 건륭제의 말년 )에 발생한 [[백련교도의 난]] 및 [[묘족]]의 반란이 거의 10년을 끌어 전비만 수억냥을 지출할 정도로 악전고투했고, 1810년대부터 중국에 [[아편]]이 유행하면서 무역수지가 적자로 들어서고, 아편 중독자들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여 현대로 말하면 "쌍둥이 적자"를 기록하면서 청나라가 국가막장테크를 탔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건륭제의 치세를 살펴보면 대외적으로는 가장 크고 화려한 시기였다. 물론 이런 확장으로 인한 과다한 전비지출과, 풍요로 인한 관료 기강의 해이가 시작되었으나, 적어도 건륭제 시기에는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역사가 [[진순신]]은 그의 저서에서 건륭제 시대를 '가장 행복했던 세대'라고 기술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