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일화 == 현대에 와서는 학자들에게 비판도 많이 받고 재평가도 혹독하게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강희제]]와 [[옹정제]]의 치세를 이어받은 건륭제 때 [[청나라]]의 국력이 가장 왕성할 때이기도 했고, 풍류를 좋아하고 장난도 치는 친근한 이미지 때문인지 각종 매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건륭제 당시부터 내려오는 민간 [[야사(역사)|야사]]의 숫자도 엄청난 수준이다. 그 때문인지 [[중화권]]에서는 건륭제를 주인공으로 하는 궁중 암투극들이 [[1950년대]]부터 자주 제작되었다. 이 점에서 [[숙종(조선)|숙종]]과 비슷하다. 노년에 변덕이 심해져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많은 고관이나 선비들이 트집을 잡혀 [[문자의 옥|극형을 당하기도 했지만]], 본인은 [[태평성대]]에 황제직을 즐기며 살았으니. 실제로 전해지는 일화들을 보면 확실히 성격이 재미있는 사람이긴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 중독|태평성대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몸을 갈아넣었지만]], 본인은 두 사람이 이룩한 평화와 풍요를 즐기며 살았고(본인도 어느 정도 기여는 했지만), 말년에는 국정을 권신에게 맡긴 채 여생을 즐기며 그 기반이 무너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풍류가로서 보이는 다채로운 면모는 온 힘을 다해 성현의 도를 추구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비하면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건륭제는 밀복(평복)을 하고 사람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렇게 백성들 속에서 놀다가 느닷없이 가까운 신하의 집으로 찾아가서는 식사나 잠자리를 청해, 온 식구들이 넙죽 엎드리고 혼비백산하는 꼴을 보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었다. 건륭제가 각종 매체에서 혈기왕성한 젊은 명군으로 묘사될 때도, 흥청망청 황제놀음에 취한 중년의 꼰대 내지 개그캐로 묘사될 때도 꼭 빠지지 않는 필수요소가 바로 이 평민 [[코스프레]]이다. 건륭제는 [[차]] 애호가였고, 종종 평복으로 갈아입고 소수의 시종들만 거느리고 이름난 찻집을 찾아가 차를 마셨다고 한다. 남순시에 [[쑤저우|소주]]의 한 이름난 찻집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평복차림으로 시종과 함께 그곳을 찾았는데, 본인이 시종에게 차를 직접 따라 주었다고 한다. 시종은 원래 황제가 차를 따라주면,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모두 평복을 입었기 때문에 신분이 들통날까봐 거기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종은 손가락으로 찻상을 몇번 두드려 황제께 감사를 표했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차를 대접받으면 탁상을 가볍게 두드려 차를 대접하는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는 풍습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아내들과 딸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은 후한 편이지만 반대로 아들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에는 다소 매정한 편이다. 가장 총애하는 [[효의순황후]]의 가문을 2번이나 대기(抬旗)[* 팔기가문에 속하는 기(旗)를 변경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시켜줬고, 측실부인 소생의 공주들에게조차 화석공주가 아닌 고륜공주로 승격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들들 중에서 건륭제로부터 직접 친왕 작위를 받은 아들들은 몇 없다.[* 17명이나 되는 황자들 중에서 5황자 영기, 8황자 영선, 11황자 영성, [[가경제|15황자 영염]]만이 건륭제 살아생전에 친왕 작위을 받았을 정도였다. 결국 아버지 건륭제로부터 봉작을 받지 못한 황자들은 이복형제인 [[가경제]]가 즉위하고 나서야 겨우 봉작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건륭제가 아들들에게 친왕직을 안준 이유는 조부 강희제 시절 아버지 옹정제와 숙부들의 궁정암투를 보고 자랐고, 본인도 차기 황위를 두고 셋째형 홍시에게 도전을 받았던 과거 때문인 듯하다. 알다시피 청나라는 황자들에게 전부 친왕직을 주지 않았는데, 친왕직을 준다는 건 그만큼 후계자 후보로 생각한다는 뜻이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당장 건륭제부터가 옹정제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친왕으로 책봉되었다. 친왕이라는 작위 자체에 후계를 비롯한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다보니, 건륭제 입장에서도 아들들에게 친왕직을 주는 걸 꺼릴 수밖에 없었을 것. 실제로 건륭제 시절 친왕으로 책봉된 황자들 중 8황자 영성을 제외하면 5황자 영기나 11황자 영성도 후계자 후보로 추정되던 황자들이다.] 권신 [[니오후루 허션]]이 사실은 건륭제의 [[동성애|동성 연인]]이라는 의혹이 있다. 또 청나라 황실인 아이신기오로 씨족이 아님에도 버이서에 오르고 죽어서는 군왕작을 추증받을 정도로 허션 이상의 권세를 누렸으나 건륭제가 퇴위하던 해에 요절한 [[부찰 복강안]]이 실제로는 건륭제의 혼외자라는 의혹도 있다.[* 건륭제의 첫 황후였던 [[효현순황후]]의 친정조카로 [[부찰 부항]]의 아들이다. 유아기 때부터 황궁을 들락거리며 성장해서 고모부인 건륭제에게 유달리 사랑받았다. 복강안말고도 부찰 부항의 차녀가 건륭제의 며느리가 되는 등 부항의 자식들은 황족과 혼인하며 청대 최고의 명문가로서 영예를 누렸다.] 현대 매체에서 아주 빈번히 묘사되는건 아니지만 대중과 문학가들에게는 흥미로운 소재로 꼽힌다. 동성애야 딱히 검증할 방법이 없지만 다른 형제들처럼 복강안도 [[부마#駙馬, 황제·왕의 사위]]로 삼으라는 제안을 건륭제가 허허 웃어넘겼다는 일화라든가 초상화로 남아있는 복강안의 외모[* 특히 능글맞은 눈매.]가 아버지 부항이나 부찰 가의 다른 형제들보다는 옹정제나 건륭제와 비슷해보이는 등 여러 정황이 있어서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다. [[베이징시]]에 있는 [[궁주펀역]] 인근 공주묘가 건륭제의 수양딸이 묻힌 곳이라는 설이 있으나 현재도 입증되지 못하였다. 흥미롭게도 동시대에 재위한 군주들 중 바로 옆 나라인 조선의 정조와 매우 비슷하다. 사실 건륭제는 정조보다 40년 먼저 태어났지만, 사망 시기는 비슷하다. 건륭제가 1799년 2월 7일(양력)에 먼저 사망한 후 1년 6개월 후인 1800년 8월 18일에 정조가 사망했다. [* 정조는 워커홀릭인데다가, 골초에 주당이었지만, 건륭제는 40대 이후로는 일보다는 노는 걸 좋아하고, 술대신 차를 더 애호했다. 이런 차이가 건륭제를 희대의 장수황제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시기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서 본인 대가 나라의 전성기 혹은 중흥기였고 본인 사후 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고 그 발단이 본인에게 있다는 점이다. 다만 정조는 재위기간 내내 나라가 기울게 할만한 실책은 없었고 단지 김조순을 세자의 후견인으로 밀어준 것이지만 김조순은 막후의 실세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다가 결국 조선을 [[세도정치]]라는 최악의 외척 정치로 넘어가게 한 원흉이 되었다. 반면 건륭제는 자기 실책도 있고, 허션을 중용한 자기 재위기부터 쇠퇴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일을 하다 시간이 나면 무조건 시를 왕왕 썼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별로라서 별로 좋은 평은 듣지 못한다. 건륭제는 자신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온 조선의 사신에게 [[정조(조선)|정조]]의 안부를 묻고, 이때 훗날 [[순조]]가 될 왕자가 두달 전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자, 건륭제는 경사라며 정조에게 자신이 걸고 있던 염주를 주었다고 한다. 정조는 이를 받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를 본 신하 윤행임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춘추의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조대왕은 "의리는 의리고 은혜는 은혜다"라고 건륭제에 대한 감사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https://news.nate.com/view/20230414n01734?mid=n0100|#]] 일성록(日省錄) 1781년 4월 18일 기사에 의하면 조선 사신들한테 융숭한 대접을 해주어 청나라 민간에서 고려황제(高麗皇帝)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https://cafe.daum.net/historywar/Nwp/3235|#]] >'''황제가 우리나라에 대해 대우하는 것이 조금 자별(自別)하여 산해관 안팎의 여염 사이에 고려황제(高麗皇帝)라는 속어가 있기까지 합니다. '''이 때문에 그곳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않고 역인(驛人)이나 쇄부(刷夫)들도 이러한 물정을 익히 알아 기세를 부려 저들을 대하려고 하는데도 저들이 반드시 물러나고 움츠려 모두 삼가고 피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館)에 머물 때 또 방비하고 보호하기를 매우 충실히 하여 일마다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또한 연전에 화재가 나고 사람이 압사하는 등 여러 가지 사단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감히 방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일성록(日省錄) 1781년 4월18일 기사 中 정조에게 바친 임제원(林濟遠)의 청국 탐문 보고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 임제원(林濟遠)이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