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개혁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ianlong_Horse.jpg|width=100%]]}}} || || '''{{{#FFD700 백마를 조공품으로 받은 건륭제}}}''' || 건륭제는 황제가 된 후 그가 존경하는 [[강희제|할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건륭제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벌였는데 대부분은 강희제처럼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보다는[* 다만 강희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한 것은 [[준가르]]의 갈단 칸 정벌 때뿐이다. 그리고 친정할 이때에는 갈단이 동으로 공격해와서 외몽골지역을 점거하여, 청의 북변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장군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독려를 하는 편이었다. 이때 건륭제의 부대는 [[팔기군]] 대신 만주족과 한족이 합쳐진 군대였는데, [[준가르]] 정벌군 총사령관이었던 보르지기트 반디(Borjigit Bandi, 博爾濟吉特 班第), [[준가르]] 및 동투르키스탄 정벌에서 활약한 우야 자오후이(Uya Jaohui, 烏雅 兆惠)[* 1706~1762. 작위는 1등 무용공 겸 3등승은공. 3등승은공이라는 작위에서 알 수 있듯이 자오후이의 고모할머니는 [[옹정제]]와 순근군왕 윤제의 생모인 [[효공인황후]]다. 즉 건륭제와도 6촌 관계], 아구이(Agui, 阿桂), 건륭제의 처남인 푸차 푸헝(Fuca Fuheng, 富察 傅恒), 그의 아들인 푸차 푸캉안(Fuca Fukanggan, 富察 福康安)[* 여담이지만 황제의 딸에 등장하는 이강과 이태가 복(福)씨로, 극중 영비의 사촌 친정(즉, 영비가 이강과 이태의 이모 뻘)으로 나온다.] 등이 활약하였다. 건륭제는 옹정제 때 탄압받은 숙부들을 사면하였는데,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드는 것만은 막았다.[* 이는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들어 제위쟁탈을 벌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에는 보갑제(保甲制)와 이갑제(里甲制)라는 제도를 뜯어 고쳤다. 보갑제는 100 가구를 모아서 갑(甲), 그리고 그 10개의 갑을 모아 보(保)로 나누어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끼리 서로 질서와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하는 제도였다. 본래 [[북송]]의 [[왕안석]]이 신법으로 쓰려다가 수포로 돌아간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이후 강희제가 부분적으로 시행하다가 옹정제 때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보·갑의 장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백성들의 호적을 조사하고 그 기록을 관아에 바쳤고 수상한 촌민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막대한 사익을 취하자, 1740년(건륭 5년), 건륭제는 정확한 인구 조사를 위해 각지의 보·갑장에게 가구당 세는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하였는데 계산한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놓고 매년 인구 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건륭제는 청나라의 총 인구 수를 보다 정확히 알게 되었고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여 사익을 취하려 한 경우를 차단하여 또한 이를 방치하거나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려 특히 이 중 그 행태가 심한 자는 참수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95px-The_Qianlong_Emperor%E2%80%99s_Southern_Inspection_Tour.jpg|width=100%]]}}} || || '''{{{#FFD700 건륭제의 남순}}}''' || 강희제처럼 건륭제도 남순을 자주했다. 이때 건륭제가 한번 움직이면 기본으로 황제를 보좌하는 황자와 공주, 대신, 환관, 시녀, 요리사, 호위병 등 3,000여 명이 움직였다. 남순을 할때 건륭제는 유명한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풍류를 즐기는것을 좋아했다. 특히 시와 그림을 좋아하며 관심이 많았기에 이때 유명한 시인과 화가들도 초청해서 같이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시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강희제는 남순은 자주 했어도 예산을 철저하게 짜서 백성들의 부담은 없었는데,[* 최소한의 인원으로 편성해서 최대한 조용한 방식으로 갔다왔으며, 지나가는 길에 총신들의 집에서 유숙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아꼈다. 이에 강희 말년 부정부패에서 위동정이라는 총신이 이 비용을 부담하느라 국고에서 돈을 빌렸다가 큰일이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강희제는 [[내탕금]]을 써서 위동정의 돈을 갚아주었다.] 건륭제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신나게 놀고 없으면 다시 돈을 여기저기서 마련해서 계속 움직이는 식이라 돈이 많이 들었다.[* 다만 백성에게 뜯어냈다는 이야기는 사실 무근으로, 건륭제 중기 이후 청나라는 지정은제 확립 및 서방과의 관세가 폭증하여 오히려 감세정책을 썼고, 오히려 건륭제는 남순할 때마다 반청감정이 극심한 해당지역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그러고 훗날 사서 등을 편찬할 때 자신의 남순을 [[강희제]]의 남순, 사냥 원정[* 강희제는 몽골 귀족들을 모아 놓고 사냥으로 군사 훈련을 병행했는데, 청나라의 부와 번영을 과시하고 청에 대한 몽골 귀족들의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 시행했다. [[강희제]]의 유조에 남아있는 사냥에서 어쩌구~는 이 사냥 원정의 결과물들이다. 강희제 시기에는 산해관 입관 이전까지의 정책적 영향과 조모였던 몽골 출신의 효장문황후가 생존하였고, [[삼번의 난]]으로 북변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이후 갈단의 공격에 외몽골의 부족들이 남하하면서 이들에 대한 충성을 받아야 하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건륭제 시기에는 변방이 안정되어 그런 것들이 거의 없었고,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과 비교하며 정당화하는 한편 부정적인 의견은 기재하지 못하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