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십전 무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0.att.hudong.com/01300000110309123563232701275.jpg|width=100%]]}}} || || '''{{{#FFD700 갑옷을 입은 건륭제.[* 이탈리아의 선교사 카스틸리오네가 서양식 화법으로 그렸다. 청나라 황제는 [[팔기군]] 정황기(노란 깃발 부대)의 수장이기 때문에 황금색 갑옷을 입는다.]}}}''' || 건륭제는 60년의 치세 동안 총 10회의 원정을 수행했다 하여 자신의 별호를 십전노인(十全老人)으로 자칭하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 몇 개의 원정은 하나의 원정을 10이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쪼갠 것에 가깝다.[* 준가르 2회, 위구르 1회, 진촨 유역 2회, 대만 반란, 베트남, 미얀마, 그리고 네팔 샤왕조 2회] 이 10회의 원정은 [[위구르]]나 진촨(金川) 유역처럼 현재의 중국 영토인 곳으로 감행한 것도 있으며, [[베트남]]이나 [[미얀마]]처럼 외국에 감행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총 10회의 원정으로 건륭제는 [[원나라]] 다음으로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그 영토는 현재의 [[캐나다]]보다 큰 약 1,470만㎢에 달한다. 이 시기 청나라의 판도 하에 있던 인구는 무려 3억을 넘었다. 이 당시 건륭제의 최대 업적은 바로 '''[[준가르]]의 복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희제]],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 온 청나라 최대의 위협 세력인 준가르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국경을 신장 일대까지 넓혔고, 또한 이후 대금천과 소금천을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네팔]]을 정벌하여 티베트 서부 국경을 안정시킴으로써 청나라와 그 뒤를 잇는 현대 [[중국]]의 서부 국경을 확정한 것은 건륭제의 온전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만]]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이 신강의 면적은 한반도의 10배 가까이 되며, 만주와 맞먹는다. 현재 중국 영토의 1/6을 늘려놨다. 여기에 티베트를 보호국으로 병합하여 강희제 시절의 청나라의 영토에서 40% 가깝게 늘려놓았다. 이 신강 지역은 후에 이슬람교도의 난이 벌어지기도 하며, 100년 후에는 [[야쿱 벡]]이라는 중앙 아시아의 모험가가 침입해서 난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19세기 안 그래도 흔들리는 청나라의 혼란을 더 증폭시켰지만, 대부분의 영토는 고스란히 중화민국으로도 전해졌고, 현재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건륭제의 정복 전쟁은 성과가 애매모호한 경우도 있었다. [[버마]]에게 4번의 침략이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베트남]]([[후 레 왕조|여왕조]]) 정벌에 있어서는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전염병 등의 문제로 인하여 [[광중제|완혜]]에게 패하고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형식적인 복속을 얻어내는 데 그쳤다. 어떤 역덕들은 이런 원정이 청나라의 재정에 부담이 되어 이후 청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설명한다.[* 비슷한 경우로 [[요나라]]가 있다. 요나라 또한 [[여요전쟁]]에서도 처참하게 패한 후 고려를 형식상 요나라의 제후국으로 만들었을 뿐 상국으로서 고려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지는 못했다.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제압하는데 실패하여 송나라를 제후국이 아닌 형제국으로 그치게되었다. 나중에는 발해 멸망, [[발해부흥운동]] 진압, 여요전쟁 등 한민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와 군사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결국 요나라의 국가 재정과 인력 문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 고려를 공격하는 와중에 발해멸망 이후 압록강 서안에 자립하고 있던 여진족들을 복속시켰으며,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의 황제가 동생이 되었지만, [[소태후]]가 송황제의 숙모가 되면서 가장 윗자리를 가지면서 막대한 세폐를 지급받으면서 경제적 풍요를 가지게 되었다. 오히려 거란의 멸망은 정치체제 자체적인 결함과 세폐로 인한 경제적 풍요에 거란인들이 무사적인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곳, 그리고 황실 내부 권력 암투 속에서 찾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점은 [[수나라]]도 비슷한 편이다. 수나라 역시 [[문제(수)|수문제]]까지는 정치가 잘 발전되어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양제(수)|수양제]] 이후 잦은 원정으로 수나라의 영토를 넓혔고 왠만한 나라들을 복속시켜 수나라의 부하처럼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긴 군사원정은 후기로 갈수록 국력이 약화되고, [[고구려]] 침략에 대한 집착과 [[명군]]이자 [[성군]]인 [[영양왕]]과 [[명장]]인 [[을지문덕]]과 [[영류왕]] 고건무가 있는 [[고구려]] 원정에 실패를 하면서 역으로 수나라만 더 심해졌다. 통일하여 대국을 만들고 웅장하고 온화한 문화를 만들었음에도 지나치게 잦은 군사원정은 훗날 [[대운하]]를 다시 공사 및 억지로 빨리 완성시켜 백성들과 일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준 것과 더불어 단명왕조가 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고 훗날 수나라가 망한 후 수나라 전역은 빈 공간처럼 되다가 훗날 [[당나라]]가 차지했다. 그나마 건륭제는 강남 유람을 즐겼을지언정 [[진(영성)|진나라]]의 [[만리장성]]이나 수나라의 대운하처럼 무리한 대규모의 공사 작업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폭정도 [[양제(수)|수양제]]나 [[시황제|진시황]] 같은 폭정까지는 아니었다. 준가르부에 대한 학살문제가 있긴 하지만, 현대가 아닌 전근대 시절의 학살은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고, 준가르 자체도 주변민족에 여러가지 약탈이나 납치 같은 악행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 당시에는 크게 비난을 받는 일은 아니었다.] 군사적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 이 원정의 의의가 낮게 평가되는 면이 있지만, 이 전쟁 결과 청나라는 버마와 베트남과 형식적인 [[조공관계]]는 맺었으며, 이런 조공관계는 국내적, 대외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건륭제의 정치적 성공으로 선전되면서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데 기여했고, 외교적으로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이런 조공관계는 형식상의 명분을 받으면서 경제적으로는 "황제의 배포"라는 이름으로 더 큰 답례품을 줘서 조공국을 회유하는 성격이 강했는데, 이 형식으로 공식적인 외교 채널이 열린 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현안이 생기더라도 군사적 충돌보다는 외교적 교섭으로 해결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에서 꼭 실속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후 버마와 베트남은 이후 조공무역이 짭잘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형식상의 "상국"인 청나라의 영토인 북쪽으로의 확장은 단념했고, 버마는 그 대신 동서([[타이]] 및 아라칸)로, 베트남은 남쪽([[참파]])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버마와 베트남 방면에서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별 충돌이 없었으므로 건륭제의 원정은 군사적 완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남방을 안정시킨 업적으로 칠 수 있다. 이후에도 청나라의 보호국 [[티베트]]를 침략한 [[네팔]]과 비슷하게 강화를 맺고 형식적인 군신관계를 맺으면서 네팔의 조공품에 후한 답례품을 주면서 네팔의 침략을 억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