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예술 애호 황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ianlong11.jpg|width=100%]]}}} || || '''{{{#FFD700 시상을 떠올리는 건륭제.[* 아이러니하게도, 한족들의 [[한푸]] 착용을 금지한 것과 반대로 만주인 귀족들이랑 심지어 청의 황제들은 한푸를 입고 생활한 적이 제법 많았다고 한다. 물론 [[변발]] 풍습은 청이 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지만, 대신 시대가 흐르면서 청나라의 변발도 점차 머리를 덜 밀어내는 형태로 변해갔으며 그로 인해 청나라 말기에는 청나라 변발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인 음양두가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참고로 이 그림은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이자 청나라 궁정 화가였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 이름은 낭세녕)가 그린 그림이다.]}}}''' || 청나라는 황실의 사치로 멸망한 전대의 명나라를 항상 [[타산지석]]으로 삼아 대체로 황제들도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도 새 왕조가 개창하면 대체로 옛 왕조의 왕궁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 지었으나, [[도르곤]]과 [[순치제]]는 명나라의 황궁인 자금성을 그대로 청나라 황궁으로 사용했다. 그 뒤를 이은 강희제나 옹정제는 검소함으로 유명했고, 예술을 즐길 시간도 없이 정사만 몰두했다. 하지만 건륭제는 이런 청교도적인 선대 황제들과는 달리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예술을 애호하여, 예술품을 광적으로 수집했으며 본인 스스로도 서예나 서화에도 능했고 시도 즐겨 지었다. 건륭제는 유명한 예술가들을 후원하거나 황궁에 초청해 다회(茶會)[* [[차]]를 마시며 노는 모임.]를 여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런 예술가들은 초청받은 댓가로 황제 앞에서 글씨나 그림을 남겨 기증해야했지만, 그림값 명목으로 두둑한 은자나 값비싼 다기를 받아왔으니 딱히 [[재능기부]]를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건륭제는 때때로 이렇게 초대된 예술가들에게 마음에 든 걸작품을 팔라고 떼를 썼고, 예술가들은 자기가 소장하려고 남긴 작품도 황제의 간청을 거절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황제에게 팔아야 했다. 그래서 당대의 이름난 서예가나 화가들은 걸작을 그렸을 경우 두 벌을 마련해 황제가 달라고 했을 때 복제본을 진상했다고 한다. 건륭제의 글씨와 그림은 이렇게 수준급이라 여러 작품이 남아 있다. 건륭제의 글씨는 [[송나라]] 시대의 [[왕희지]], [[미불]], [[명나라]]의 [[동기창]][[체#s-2.3]](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명필이라고 불릴만 했다. 문제는 본인의 글씨에 너무 자부심이 많아서, 자신이 수집한 여러 명화에 작품에다가 자신이 직접 감상평이나 시를 남겼는데, 하필이면 건륭제의 시재는 필체에 미치지 못한지라 후대에 이는 [[반달리즘]]으로 간주되고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npm.gov.tw/m3_7pic_6s.jpg|width=100%]]}}} || || '''{{{#FFD700 고고정도(高高亭圖)}}}''' || [[내탕금]] 뿐만 아니라 심복 허션이 부정축재로 모은 비자금을 써서 저명한 고서화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신은 '''고서화의 운치를 망쳐버린''' 인물로 악명이 자자하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중국화 학자로 유명한 마이크 설리번이 '''탐욕스러운 미술 수집가이자 빈약하고 독단적인 감식안의 소유자'''라고 비꼬았을 정도. [[원나라]] 시대의 화가 방종희의 "고고정도(高高亭圖)"는 건륭제가 망쳐놓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운치 있는 절벽을 그려놓은 작품에 눈에 확 띄는 최상단 중앙부에다가 '''떡하니 자기 인장을 찍어 놨다.''' 덕분에 고고정도를 감상하는 사람은 그림 자체보다 건륭제의 큼지막한 인장이 먼저 눈에 들어올 정도.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ortus.webnow.biz/m534.jpg|width=100%]]}}} || || '''{{{#FFD700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 || 조맹부의 걸작인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에도 건륭제의 흔적이 많은데 여러 도장을 찍고 시를 적는 등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는 [[북송]]의 [[휘종(송)|휘종]]이 직접 그린 "계산추색도"라는 걸작을 수집하고 나서, 상술한 "고고정도"에 찍힌 것과 동일한, 큼지막한 인장을 찍어놓고, 여러 자잘한 인감을 찍은 뒤, 좌측 상단부에 자신의 엉터리 시까지 적어놓았다. [[https://twitter.com/youweiwanxiang/status/1128984897811492865|#]] 사실 고서화는 도장이 많이 찍혀있는 것들이 많은데, 대부분 그림이 다른 수집가에게 넘어갈 때마다 그림의 새 주인이 기념으로 찍어놓은 것이다.[* 보통 고서화를 수집한 주인들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과시하기 위해 인감을 찍는데, 보통은 그림의 운치를 망치지 않기 위해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세심하게 위치를 선정해가며 찍었다. 그런데 건륭제는 인감 찍는 게 취미였는지(...), 여러 개의 도장을, 그것도 큼지막한 도장을 그림 한 가운데에(...) 떡하니 찍은 것도 수두룩하다.] 또한 [[조선시대]]에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안평대군]], [[신숙주]], [[박연]], [[김종서(조선)|김종서]] 등이 모두 그림에 감상평을 적어 놓은 것에 보듯이[* 다만 이들은 건륭제처럼 그림에다 직접 글을 쓴 건 아니고, 그림 옆에 같은 사이즈의 종이를 계속 잇대어 거기에 쓴 것이기에 똑같이 취급하기는 어렵다.], 유명한 문인들이 명화에 자신의 감상평이나 시를 남기는 것도 동양의 전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건륭제는 하필이면 문재로는 평범했던지라, 후대인들의 원성을 듣게 된 것이다. 이렇게 건륭제는 [[시]]를 굉장히 좋아했고, 평생 동안 4만 편이 넘는 시를 썼다고 한다. 하도 많이 쓰다 보니 책 몇 권을 채울 정도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는 문학성의 측면으로 봤을 때 그다지 좋은 평가는 못 받는다고...오죽하면 '''"[[조조]]의 시는 몇십 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저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또 중국에서는 건륭어제시천만, 불급유방구근삼(乾隆御製詩千萬, 不及劉邦句僅三。)이라는 말도 있는데, 건륭이 수도 없는 시를 썼어도 [[한고제]] 유방이 읊은 얼마 안되는 시인 대풍가(大風歌) 세 구절의 호방함을 이길 시는 하나도 없다는 표현이다. 이렇듯 건륭의 시는 중화권에선 '초등학생도 그거보단 잘 쓰겠다!'라는 악평을 듣는데 건륭의 이런 초딩만도 못한 시에 대한 일화도 있다. >어느해 겨울, 건륭제는 총애하던 시인 심덕잠 등 여러 신하들과 함께 [[항주]] [[서호]]로 갔는데 마침 눈이 내렸다. 눈꽃이 바람이 휘날려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를 보자 시흥이 일은 "대시인" 건륭제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시구를 읊었다. > >"일편일편우일편(一片一片又一片, 한 송이 한 송이 또 한 송이)" > >사람들은 이 싯구를 듣고는 모두 '좋다'고 소리쳤고 역시 황상의 솜씨는 비범하여 한마디를 하니 천하가 깜짝 놀랄 정도라고 아부를 했다. 원칙도 없는 아부의 소리를 들으면서 건륭제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하여 읊었다. > >"삼편사편오륙편(三片四片五六片, 세 송이 네 송이 대여섯 송이)" > >이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것이 '시'라면, 어린아이라도 하루에 몇 편씩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계속하여 밀물처럼 호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떠받들리기 좋아하는 주인에게 [[아부]]를 계속한 것이다. 건륭제는 기운이 나서 뒷구절을 또 읊었다 > >"칠편팔편구십편(七片八片九十片, 일곱 송이 여덟 송이 아홉열 송이)". > >이 싯구까지 나오자 모두 멍해졌다. 설마 이 어르신이 숫자를 세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뒤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이 "백편천편만만편(百片千片萬萬片, 백송이 천송이 만만송이)"는 아니겠지? 이것도 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건륭제 역시 여기까지 읊은 후에 더 이상 시구를 잇지 못했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이런 난감한 순간에, 심덕잠이 일어나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 >"황상의 시는 너무나 좋습니다. 바라옵건데 신이 개꼬리로 담비를 잇도록(狗尾續貂)해주십시오." > >마침 난감한 처지였던 건륭제로서야 당연히 윤허할 수밖에. 그리하여 심덕잠이 마지막 구절을 완성시킨다. > >"비입매화도불견(飛入梅花都不見, 매화꽃으로 날아 들어가니 모두 보이지 않네)" > >이 마지막 구절로 인하여 전체 시의 품격이 살아났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크게 칭찬하면서 그에게 담비가죽 옷을 하사했다. 그리고 이 시는 건륭제의 소유로 되었다. 이 시는 청패류초(淸稗類鈔) 순행(巡幸) 에 나오는 일화라고 한다. 아무튼 건륭제가 정말 시를 좋아한 것은 맞아서 대신들에게도 이런 시를 선물로 줄 정도였으며, 평소에도 유명한 시인을 초청하여 시 낭송하는 것을 즐겼다. 건륭제는 특히 예술품 수집을 즐겼는데, 고대 [[상나라]] 때부터 제작된 중국의 각종 예술품을 시대별, 장르별로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했으며, 등급을 매겼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일이며, 이후 청나라가 망했을 때도 그대로 [[자금성]]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는 이후 [[국부천대]] 때 [[장제스]]가 그대로 옮겨가서 현재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가면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