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마국 (문단 편집) === 백제국에게 병합되어 가는 시기 === [[목지국]]이 [[백제]] [[고이왕]] 혹은 [[책계왕]]의 급습으로 3세기 후반에 수장 자격을 부정당한 이후에도 목지국이 위치한 충청도 북부는 그렇게 순순히 백제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았고, 현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를 중심으로 했던 신월리 집단이 이끄는 [[침미다례]] 또한 마한 [[신미국]]을 자처하면서 백제국의 후기 마한 영도국 자격을 부정했다. 하지만 건마국은 마한 일대의 이 급격한 변화 과정에서 딱히 뭘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건마국 입장에서 보면 목지국은 마한 그리고 삼한의 수장 자리를 빼앗아간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딱히 무리하게 목지국의 편을 들 의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 같은 마한이라는 이유로 자주 묶이는 침미다례와의 관계를 보면, 이 시기 건마국은 묘제나 문화 조합으로만 보면 영산강 유역의 침미다례(신미국)와 공통점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토착민계 토돈분구묘, 주구묘, 그리고 고조선계 토광묘제[* 단, 상술했듯 침미다례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위만조선 출신인 반면 건마국에서는 위만조선계 유이민들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매우 묘한 상황이다.]의 조합. 그러나 주도 집단과 조선계 유민의 상황은 매우 달랐음이 눈여겨볼 부분이다. 건마국 주도 집단은 적어도 그 시기엔 토돈분구묘 및 주구묘 집단이었던 반면, 침미다례의 주도 집단은 위만조선계 집단이었고, 상술했듯 건마국의 조선계 집단은 대부분 준왕 망명 때 내려온 집단인 반면 침미다례의 조선계 집단은 위만조선이 망할 때 내려온 집단이었다. 즉 주도 집단이 달랐던 데다, 서로 얽힌 이런저런 역사적 사정으로 연합이나 제휴가 대단히 어려웠다는 얘기다. 게다가 건마국 일대는 백제와의 거리 또한 침마다례보다는 훨씬 가까웠기에 백제에 대한 태도는 목지국이나 침미다례와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목지국은 옛 제후국인 백제국 밑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 당시엔 더 이상 마한 수장국도 아니었고 백제국을 휘하에 거느려본 적도 없는 건마국 입장에선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얘기였으며, 침미다례는 무역로상 이권이나 해로 장악 등등으로 백제에게 빼앗길 게 많았으나 이 또한 건마국 입장에선 남의 얘기에 불과했다. 때문에 건마국은 근초고왕 시기에도 공납 및 간접적 관리에 그쳤고 개로왕대의 한성 공함 이후엔 아예 잠깐 따로 독립까지 했던 걸로 추정되는 침미다례 일대와는 달리, [[근초고왕]] 시기부터 이미 간접 지배 상태에 들어갔던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한성백제]]는 건마국 해체에 대해 진지하게 구상하는 단계에서부터 건마국 내부에 아직 남아있던 옛 고조선 직계 집단들에게 주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준왕 집단과 같은 고조선계 토광묘제 집단이었던 익산시 입점리 및 웅포리 세력을 지원하여 건마국에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금동관]]을 비롯한 위세품이 유독 건마국 내 비주류 집단인 옛 준왕계에게만 나타나고 있는 게 그 증거. 이는 백제가 '''목지국 및 침미다례에게 써먹었던 그 수법 그대로'''였다. 백제는 목지국 방계 세력이었던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용원리 세력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본류였던 청당동 세력을 견제하여 결국 목지국을 완전 해체했던 바 있었다. 마찬가지로 역시 침미다례의 두 주축 중 하나였던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다른 한 축인 신월리 세력은 저항이 막심했던 모양인지 아예 무력으로 초토화시켜버렸다-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세력을 지원하여 결국은 침미다례 또한 목지국에 비해 시간은 더 오래 걸렸을망정 이런 이이제이 수법으로 완전 해체 후 직할지로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그전까진 언더독에 불과했던 광주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광주 주변 전남 내륙 세력을 친백제화하여 침미다례로부터 떼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다만 건마국에 대해선, 주류와 대립 관계에 있는 비주류 세력을 우선 지원하여 내분을 일으킨 다음 양쪽 다 제압한다는 패턴 자체는 거의 같지만 내용은 약간 달랐다. 목지국 [[청당동]] 세력은 이런 견제와 푸대접을 참다못했는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비류왕]] 시기인 4세기 중반에 궤멸당했고, 침미다례에서는 백제가 이를 악물고 응징한 탓에 고고학적으로 갑작스럽게 존재가 사라지는 소국이 두 군데나 있다. 하나는 근초고왕 때 해남 신월리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동성왕 때 해남 군곡리 세력이다. 한편 백제에게 항복을 선택한 걸로 추정되는 침미다례 시종면 세력은 목지국의 청당동 세력과는 달리 박한 대우를 꽤나 잘 참은 편이었지만 반남면 세력에 비해 낮은 대우를, 538년에 백제가 그 일대를 직접 지배할 때까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우대받은 반남면 세력마저 한성 공함 후 가야나 왜에 다리를 걸쳐대며 은근슬쩍 독립을 시도한 것이 백제 왕실을 분노하게 한 탓에, 직접 지배기에 들어가자 일정 부분 응징받아 세력이 축소되는 게 드러나면서 나주 내부에서는 복암리 등 세력이 백제 왕실의 새로운 파트너로 선택받게 된다. 한편 이런 우여곡절들이 드러나는 다른 마한 세력들과는 대조적으로, 건마국이 소재했던 익산 일대는 입점리 세력이든 웅포리 세력이든 그 외 여타 세력이든 꽤 대우받은 편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준왕 집단 방계인 입점리나 웅포리 세력이 꽤 일찍부터 지속적으로 백제 왕실에게 충성했고 한성 공함 이후에도 백제에게서 이탈하지 않았던 이유에서인지 '''좀 더 대우받았다는 것'''. 자치력은 전남 일대와는 달리 이미 근초고왕 대부터 박탈당해가는 단계였지만 대우가 좋았기 때문인지 딱히 백제 부여씨 왕실에게 불만을 품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