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문제 (문단 편집) == 개요 == [[명나라]]의 제2대 황제. 황태손으로 [[홍무제]]의 뒤를 이었지만 [[영락제|삼촌]]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실종된 비운의 황제이다. 명나라에서 오랫동안 묘호는 없고 시호는 혜황제(惠皇帝), 약칭 혜제로 돼 있었다.[* [[정난의 변]] 직후 신종(神宗)의 묘호와 효민황제(孝愍皇帝)를 올리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영락제]]가 거부했다. 태묘에 건문제의 위패를 모시고 묘호를 올리면 태묘에 제사를 지낼 때마다 조카에게 절을 해야 하므로, 영락제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묘호를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태묘에 위패를 모셨다는 뜻이다) 그래도 [[금나라]]의 [[해릉양왕]]이나 [[조선]]의 [[연산군]]처럼 황제나 왕이었던 사실 자체를 부정하진 않아서 혜황제라는 시호를 올린 것이다. 참고로 신종은 훗날 만력제의 묘호가 되었다.] 휘는 윤문(允炆). 연호는 건문(建文)인데, 1399년부터 1402년까지 사용됐는데, 사실상 건문제를 쫓아내고 즉위한 [[영락제]]가 이 연호를 무효화하여 이 시기의 연도를 이전의 연호인 [[주원장|홍무]](洪武)로 표기하도록 했고[* 이에 따르면 1402년은 홍무 35년이 된다. 이렇게 정통성 문제로 새 연호를 쓰지 않으려는 차원에서, 개원이나 황제의 붕어 등으로 대체된 기존 연호를 일부러 계속 쓰는 것을 전문 용어로 '습용'(襲用)이라고 한다. 다른 예시를 들자면, 삼국지에서 연초에 조조가 죽고 몇 달 뒤 한-위 선양이 일어난 220년에 건안 연호가 폐기되었는데, 촉한ㆍ동오는 220년에 연호를 바로 바꾸지 않고 습용했다.] 그 다음 해인 1403년부터 영락의 연호를 쓰게 하였다. 건문이라는 연호는 훗날 [[만력제]] 때인 1595년(만력 23년)에 복구된다.[* 건문제라는 호칭은 그가 사용한 연호인 건문을 따서 부르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정종원년부터 태종 2년까지 건문 연호를 사용하였다. 훗날 [[남명]]의 [[주유숭|홍광제]] 때 추존, 묘호를 혜종(惠宗), 시호를 사천장도성의연공관문양무극인독효양황제(嗣天章道誠懿淵功觀文揚武克仁篤孝讓皇帝)[* 약칭 양(황)제이다. --[[수양제|이 사람]]이 아니다--]로 올렸다. [[청나라]]는 남명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남명 정권에서 정한 묘호와 시호 또한 인정하지 않고, 계속 남명 이전에 쓰였던 '혜제'나 '건문제'로 불렀다. 그러다가 [[건륭제]] 때 건문제가 명나라 때 받은 시호 앞에 딱 두 글자를 추가하여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로 높였고[* 물론 약칭으로 부르면 종전과 똑같이 혜(황)제가 된다.] 묘호를 따로 올리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