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걸복치반 (문단 편집) === 이어지는 대외정벌 === 415년 3월, [[북량]]의 저거몽손이 서진의 광무(廣武)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걸복치반은 걸복퇴니인(乞伏魋尼寅)을 보내 호문(浩亹)을 치게 하고, 절배(折斐)에게 기병 1만을 주어 늑지령(勒姐嶺)을 점령하게 했다. 하지만 둘 모두 저거몽손에게 격파당해 걸복퇴니안은 주살되고 절배는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 해 5월, 걸복치반은 친히 3만 병력을 거느리고 북량의 황하(湟河)를 쳤다. 황하태수 저거한평(沮渠漢平)은 수하 초창(焦昶)과 단경(段景)의 꾀임에 넘어가 서진에 항복했다. 걸복필달이 저거한평을 대신하여 황하태수에 부임하고 을불부의 굴간(窟干)을 쳐 3천여 호의 항복을 받아냈다. 또, 양무후 걸복담달을 대장으로 왕송수 등을 보내 적수(赤水)에서 강족 미저강박(彌姐康薄)을 쳐 항복시켰다. 416년 정월, 걸복치반이 후진의 조양공 팽리화(彭利和)가 지키고 있는 강천(漒川)을 공격하자 저거몽손이 후진을 구원하기 위해 서진의 석천(石川)을 쳤다. 걸복치반이 답중(沓中)으로 물러나, 급히 걸복담달과 걸복첩건에게 5천 기병을 주어 석천을 구원하게 하니 저거몽손도 군사를 물렸다. 이후 저거몽손은 서진으로 사자를 보내 걸복치반을 초대하고, 두 나라는 그 자리에서 화친했다. 북량의 위협이 사라지자 걸복치반은 걸복담달과 왕송수에게 1만 기병을 주어 후진의 상규를 치게 했다. 후진의 진주자사 요애(姚艾)가 출병하여 걸복담달과 맞섰으나 포수(蒲水)에서 패배하고 상규로 도망쳤다. 걸복담달과 왕송수의 군대는 황석(黄石), 대강(大羌) 두 지역을 함락하고 5천여 호를 노략하여 수도 부한으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걸복치반이 [[동진]]의 권신 [[유유]]에게 사자를 보내 칭신하였다. [[유유]]는 답신하여 그를 평서장군, 하남공에 삼았다. 417년 2월, 안동장군 걸복목혁간에게 7천 기병을 주어 토욕혼의 모용수낙간을 재차 토벌하게 했다. 걸복목혁간은 모용수낙간의 사촌동생인 모용아시(慕容阿柴)를 요간천(堯杆川)에서 격파하고 5천여 호를 약탈해 돌아갔다. 모용수낙산이 서진의 군세를 피해 백난산(白蘭山)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걸복치반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 해 7월, 상국 적경이 사망해 걸복담달을 좌승상, 걸복원기(乞伏元基)를 우승상으로 삼았다. 후진이 유유에 의해 멸망하고 후진의 진주자사 요애가 서진에 귀순을 청했다. 걸복치반은 항복을 받아들여 요애를 정동대장군, 진주목에 임명했다. 418년, 선비족 을불부의 오지연(烏地延)이 2만여 호를 이끌고 서진에 귀순했다. 걸복치반은 오지연을 건의장군에 임명했다. 서진에 항복했던 요애가 배반하여 북량에 항복하려 했지만 그 무리들은 서진에 남길 원해 요애를 진주에서 쫓아냈다. 요애를 따랐던 무리들은 그의 숙부 요준을 추대하고 서진 조정에 보고했다. 걸복치반은 요준을 시중, 중서감, 농서공에 임명하였다. 419년, 걸복치반이 정서장군 걸복공자(乞伏孔子)에게 명하여 토욕혼을 치고 약수(弱水) 이남의 땅을 되찾게 하였다. 걸복공자는 약수에서 토욕혼의 멱지(覓地)를 대파하고 멱지는 6천여 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걸복치반은 그를 약수호군에 임명하였다. 좌위장군 걸복필달, 건위장군 제군(梯君) 등이 군사를 이끌고 강천(漒川)에서 팽리화를 공격해 격파했다. 팽리화는 단신으로 [[구지]]로 달아났고 그의 처자식들을 사로잡았다. 걸복치반은 팽리화가 이끌던 강족 3천여 호만 도성 부한으로 이주시키고 나머지 강족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편히 살게 하였다. 420년 정월, 아들인 [[걸복모말]]을 세자로 삼고 영무군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를 겸하게 했으며 연호를 건홍(建弘)으로 바꿨다. 6월에 동진의 유유가 제위를 찬탈해 [[송(남조)|유송]]을 건국하고 조서를 내려 걸복치반을 안서대장군에 임명했다. 421년 4월, 죽은 모용수낙간의 뒤를 이은 토욕혼의 왕 모용아시가 서진에 투항하였다. 걸복치반은 그를 정서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안주목, 백란왕으로 삼았다. 7월에는 북량이 화친을 깨고 우위장군 저거선선(沮渠鄯善), 건절장군 저거구생(沮渠苟生) 등이 병력 7천으로 서진을 쳤다. 정북장군 걸복목혁간이 보기 5천을 이끌고 오간수(五澗水)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2천여 명을 참수, 저거구생을 사로잡았다. 패배한 저거선선은 북량으로 도망쳤다. 422년 정월, 정서장군 걸복공자에게 기병 2만을 주어 나천(羅川)의 글한독진(契汗禿眞)을 치게하니, 걸복공자는 대승하여 남녀 2만여 명과 소, 양 등의 가축 10만여 마리를 얻고 돌아왔다. 글한독진이 기병 수천 명만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쳐버리자, 글한수해(契汗樹奚)는 5천여 호를 이끌고 서진에 항복했다. 같은 해 7월, 북량의 전장군 저거성도(沮渠成都)가 1만 병력을 이끌고 오간수를 침범했다. 걸복치반이 정북장군 출련건(出連虔)에게 기병 6천과 주어 치게 하니, 출련건은 북량군을 격파하고 적장 저거성도를 포획하였다. 424년 4월, 진남장군 걸복길비(乞伏吉毗)를 남쪽으로 보내 강족 부락 백구(白苟), 차부(車孚), 최제(崔提), 방위(旁爲)를 병탄하였다. 이후 세자 걸복모말이 북량의 황중을 점거하고 임송을 약탈해 백성 2만여 명을 부한으로 끌고 왔다. 425년 4월, 평원장군 질노건(叱盧犍)을 보내 임송을 공격하고 북량의 진남장군 저거백제(沮渠白蹄)를 사로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