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검도 (문단 편집) === 한국 === 1896년 경무청에서 경찰훈련용으로 격검 도구를 구입하고 훈련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때부터를 한국 검도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908년 경무청 주관으로 한일 양국 순사격검시합을 개최하기도 했다. 학교 검도의 시초는 1916년 사립오성학교에서 격검 시설을 갖추어 일반청년층에 지도한 것이 최초이고, 사설 도장은 1921년 조선무도관에서 가르친 것이 최초다. [[일제강점기]] 동안에 중학교 체육 종목으로 검도가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광복]] 후 검도는 일제의 잔재로 인식되어 상당히 쇠퇴했다. 이에 검도계의 높으신 분들의 모임 재경유단자회를 1948년 [[서울]]에서 개최, 이때 대한검사회(大韓劍士會)를 설립한다. 대한검사회를 바탕으로 1953년 대한검도회(大韓劍道會)를 창립하고 대한체육회에 가입한 것이 대한검도회의 시작이다. 대한검도회는 1970년 국제검도연맹(KIF)의 창립과 동시에 회원국이 되고 일본에서 열린 제1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도 참가했다. 1994년에는 대한체육회 산하단체 중 제일 먼저 사단법인으로 전환하였다. 즉 한국에서 검도의 시작은 [[구한말]]과 일본 식민지기에 일본에서 검도를 배운 사람들[* 당시에 검도와 유도를 배울수 있었던 조선인은 작위를 받은 조선인 귀족들이나 경찰 혹은 군인 정도였다.]로 부터이다. 일본 [[간사이대학]] 출신, [[오사카부]] 검도부에서 활약하다가 경기도 경찰국 도조교로 임명된 [[서정학]], [[도쿄농업대학]]에서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경기고보 교사였던 이종구, 1941년까지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있었던 다카노 사사부로의 수도학원을 필한 조선무도관의 장인 강낙원,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검도수업을 하다가 귀국 후 검도를 위하여 경찰계에 몸담고 있던 김영달, 일제부터 경찰 검도계에서 활약하던 호익룡. 상당수가 일본에서 검도를 배운 사람이거나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이다. 한편 북한에서는 친일 청산 과정에서 일제 잔재로 인식되어 뿌리까지 뽑혀서 현재 검도 인프라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1995년 발간된 조선말대사전은 '검도'를 "일제 때, 앞이 보이게 만든 털 같은 것을 얼굴에 쓰고 갑옷 비슷한 것을 가슴에 대고 참대로 만든 칼로 몸의 일정한 부분을 치거나 찔러서 이기고 짐을 겨루는 경기"라고 서술하는데, '일제 때'라고 아예 과거형으로 못 박았음이 그 흔적. 아직까지 북한에서도 수련되며 [[올림픽]]에도 출전하는 선수가 보이는 [[유도]]나, [[조총련]]을 통해 알음알음 교류되는 [[공수도]]와 비교하자면 다른 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