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검투사 (문단 편집) == 기타 이야깃거리 == [[파일:터키 로마 검투사.jpg]] 터키 [[부르두르]]에서 발굴된, 검투사 묘지의 비석에 새겨진 검투사들의 격투 모습 * 로마 최초의 검투 경기는 기원전 264년이었다. 집정관이 주최한 최초의 공식 경기는 기원전 105년이었다. * 검투가 벌어지는 콜로세움의 수용 인원은 5만 명, [[전차경주]]를 하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은 2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 서기 80년에 완공된 [[콜로세움]] 개장을 축하하는 경기에서 하루에 5,000마리의 동물이 죽었다. 개장 후 100일간 죽은 동물의 총수는 90,000마리에 달한다. * 콜로세움의 지하에는 동물 우리와 검투사 대기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 콜로세움에는 1.5m까지 물을 채울 수는 있지만, 새어나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최소한 두 번의 모의 해전이 벌어졌다. 콜로세움 이외에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나우마키아'라는 [[저수지]]가 해전장으로 쓰였는데 이 저수지의 넓이는 20만 제곱미터였다. 한 번의 행사에 19,000명의 검투사들이 몰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 베스티아리 문단에서도 언급된 로마 황제 [[콤모두스]]는 검투사 황제라 일컬어질 정도로 검투사란 직종에 환장하기로 유명했다. 어느 정도였나면 말년에는 아예 검투사들과 함께 검투사 숙소에서 지내는 황제가 되려고 했을 정도다. 이외에도 그의 지나친 검투사질에 골몰하는 것 때문에 그는 민심을 잃었고 정적들이 그가 죽기 전부터 암살 각을 재게 되었다. * 네로의 그리스도교 탄압 당시 콜로세움에서 그리스도교도를 콜로세움 한가운데에 묶어놓고 사자를 풀어놓아 뜯어먹히게 만들었다는 학살설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런 식의 처형법은 영화 [[쿼바디스]]에서 잘 묘사되었다.] 사실 중세 시대에 콜로세움의 공간을 이용해서 민가로 불하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의 프란지파니 가문은 콜로세움을 사들여서 요새화해서 성채로 삼기도 했다. 바위를 빼다가 건축 자재로 써버리는 일도 잦았다. 순교자가 생긴 장소에 대해 보여주는 기독교적 묵상과는 영 딴판인 취급이었던 것이다. 사실 콜로세움이 종교적 성소로 여겨지게 된 것은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가 난 성소[* 로마가 크리스트교를 탄압하면서 초기 신자들을 사자에게 물어죽이게 한 장소.]라고 선포하면서였다. 하지만 베네딕토 14세의 주장을 입증하는 역사적 근거는 전혀 없으며, 16세기 이전에 기독교가 그와 같은 입장을 보인 적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흔히 생각하는 거와 다르게 네로 황제 때는 콜로세움이 없었다. 그 자리에는 원래 네로 얼굴로 된 거대한 거상이 있었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그 거상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경기장을 지어서 콜로세움[* 거상은 라틴어로 콜로수스다.]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네로 황제의 콜로세움에서의 박해에 관한 이야기이며, '''로마가 사자에게 그리스도인들을 밥으로 던져주며 박해한 것은 엄연히 사실이다.''' 실제로 네로도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 학살을 안 했을 뿐, 화재의 원인을 무고한 기독교도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짐승들의 밥으로 줘버리는 처형법을 시전했다. 위에서 언급된 베스티아리의 죄인 버전. >이 놀라운 행위(순교)는 어느 로마 도시에서나 가장 중요한 공공장소 가운데 하나에서 아주 암울하게 진행되었다. 순교는 원형경기장의 구경거리라는, 로마인들의 생활을 특징짓는 폭력과 질서가 복잡하게 뒤얽히는 축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기독교도들의 순교가 유혈이 낭자한 구경거리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77년 리옹에서 한 무리의 기독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중은 기독교도들이 고문대에서 찢기고, 철판 의자에서 그을려지고, 황소 뿔에 받히고, 굶주린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며 갈채를 보냈다. 원형경기장에 질서 있게 앉은 잘 차려입은 군중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도들을 사자에게 던져주는 행위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로마 다수파의 권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 >Christopher Kelly,[* 케임브리지 대학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교수. 로마 제국사(고대 말기) 전공.] 「The Roman Empire」 * 그리스도교 쪽에서는 검투를 엄청나게 싫어하였다. 콜로세움에서 검투 경기를 반대하다가 분노한 관중들에게 맞아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밀라노 칙령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검투 경기가 금지되면서 이 노력은 결실을 이룬다. 비록 검투 경기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보다는 스포츠적 요소가 강하기는 했으나, 사람의 목숨이 오락거리로 쓰이는 건 고대인들의 눈으로 보더라도 윤리적으로 논란거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금지된 것은 아니고 죽이지 않는 방식으로 좀 강도가 완화돼서 진행되고 한쪽이 항복을 선언하면 무조건 승리를 인정하는 식으로 서서히 줄어들었다. >자네의 눈과 귀를 도회지로 돌려 보면, 자네는 가장 황폐한 곳에서보다 더 슬픈 군상들을 보고 마음 아파할 걸세. 저곳에는 포악한 눈들의 욕망을 피로 충족시키기 위해 칼부림 유희를 준비하고 있군.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 몸을 살찌우고, 건장한 지체에 기름바르는 것은 살육당하기로 이미 작정된 살찐 육체가 더욱 값비싸게 죽어 가기 위해서이네.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죽어 가고 있네'''. 사람을 죽이기 위해 경험을 쌓고 연습하고 기술을 연마하지. 이런 극악한 짓이 자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있네.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더 참혹한 일이 어디 있겠나? 살인하는 능력을 쌓는 것이 훈련이요, 사람 죽이는 것이 영예이네. 자네에게 물어 보겠는데, 꽃 같은 나이에 멋진 체격을 가진 자들이 죄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값진 옷을 입고서 맹수들과 대적해 싸워야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짓인가? >멀쩡히 살아 있는 자들이 자원해서 자신의 장례를 위해 치장되고 있고, 처참히 죽은 자들이 영광을 받고 있네. '''그들이 맹수들과 싸우는 것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광기 때문이네.''' >---- >체칠리우스 치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 AD 210~258), 《도나투스에게(Ad Donatum)》 中 * 투기장의 관중석에서는 오늘날 [[야구장]]에서처럼 잡상인이 차가운 음료수, [[빵]], [[소시지]] 따위를 팔며 돌아다녔다. 콜로세움 개장식 같은 축하 행사 때는 황제가 관중에게 음식과 음료를 한턱 쐈다고 한다. * [[엄지]]를 밑으로 향하는 것이 패자의 숨통을 끊으라는 표시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희박하다. 유베날리스는 "엄지를 세워 뒤로 젖히면 패자를 죽인다."[* 1693년판 번역본]라고 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고전학자 존 메이어의 1853년판 번역본에는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면 찔러 죽이라는 신호, 바닥을 가리키면 무기를 버려 살려주라는 신호였다."라고 나와 있다. 루이스와 쇼트가 쓴《라틴어사전(1880)》의 "엄지" 항목을 보면 "오므리면 부정이고, 펴면 긍정이다."라고 쓰고 있다. * 검투사의 주식은 [[보리]]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밀]]은 사람들이 먹는 곡식이었고 [[보리]]는 가축의 [[사료]]였기는 하지만 딱히 검투사를 가축으로 취급해서는 아니다. 근육을 강화하는데 보리가 밀보다 더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검투사들은 '''호르데아리'''[* '''[[보리]]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라고 불렸다. [[페르가몬]]의 검투사 학교 의사였던 [[갈레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검투사들의 식사는 보리와 콩류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탄수화물 식단은 아래의 체형을 만드는 데에 유리했다. 또한 검투사들은 음료에 재를 섞어 마셨다고 한다. * 경기 중 상처로 인해 피를 흘리더라도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검투사들의 체형은 근육질 보다는 살집 있는 뚱뚱한 체형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는 [[회칼]]에 찔릴 일이 많은 [[조직폭력배]]들이 살집을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몸이 느리면 당장 칼 맞아 죽기 딱 좋기 때문에 어느 정도 스치는 상처에 버티는 수준까지만 살집을 키웠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근육돼지]] 다들 몸짱에 가까웠다. * 현대의 [[격투가]]들도 다수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서 [[챔피언]]이나 상위 랭커되면 일반인은 벌기 힘든 큰 돈 벌고 [[부유]]층이 되는 것과 노예 신분에서 [[자유]] 신분을 얻는 게 비슷한 이치로 발전하고 있다. * 죽었어야 할 패배자가 살아서 '스폴리아리움(시체실)'로 실려오면 관리인들이 숨통을 끊었는데, 죽어야 한다고 판정났을 때 이야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냥 패배하기만 했다면 다음 경기에 다시 나가면 그만이었다. * 진귀한 케이스로 로마에서는 드물었던 [[흑인]]끼리의 싸움, 난쟁이와 여자의 대결 등도 있었다. 여자가 검투사가 되는 것은 서기 20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금지되었다. * 서기 326년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죄인을 투기장에 내보내는 형이 금지되었다. 사실 검투사 사망의 거의 대부분이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봐도 되기 때문에 이후에는 검투 경기 사망자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 서기 404년에는 최소한 제국의 서쪽 절반에서는 검투사의 경기가 완전히 불법화되었다. 그러나 각종 편법으로 규제를 피해 검투 경기를 즐기는 관중들은 그 후에도 남아 있었으며, 최후의 검투 경기가 벌어진 것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도 한참 뒷날인 서기 536년 (또는 576년)이다. 이후에도 비공식적으로 검투 경기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 로마 시대 투기장의 수요로 인해 [[누비아]]([[수단 공화국|수단]])의 [[하마]], [[메소포타미아]]([[이라크]])의 [[아시아사자]], [[아프리카코끼리|북아프리카코끼리]]가 멸종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아틀라스불곰, 바바리사자도 많이 잡혔으나 멸종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일단 불곰은 유럽 대륙에서도 많이 구할 수 있으므로 굳이 [[북아프리카]]에서 잡아올 필요가 없었다. * [[아프리카코끼리|북아프리카코끼리]]는 현재의 [[아프리카코끼리]]와는 교배가 불가능한 별개의 아종으로, [[사하라]] [[사막]]으로 인해 남쪽의 동족들과 생태학적으로 분리되어 왜소화가 진행된 종. 어깨 높이 2미터 가량의 작은 코끼리였다. * 동물끼리 싸우게 하는 경기도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소년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호랑이 VS 사자]]의 경기도 있었는데, 호랑이는 [[카스피호랑이]]였고 사자는 [[바바리사자]]였다. 승패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거의 무조건 호랑이가 이겼다고 한다. 이는 통상적으로 호랑이의 크기가 더 큰 경우가 많았고, 앞쪽 한 발은 땅에 붙이고 남은 한 발만 휘두르는 경우가 많은 사자와 뒷발로 버티고 서서 두 앞발을 모두 휘두르는 호랑이의 전투 방법의 차이라고 한다. 결국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어린 암컷 호랑이와 장성한 숫사자가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불곰]]과 [[들소]][* 아마도 [[오록스]]였을 것으로 보인다.]가 싸운다든가, 황소와 [[인도코뿔소]]가 싸운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었다. * [[콜로세움]]에서는 싸움만 있는 게 아니라, 오늘날의 [[서커스]]에 해당하는 볼거리도 있었다. 사자 아가리에 팔을 집어넣는다든가, 훈련된 코끼리가 황제의 관람석 앞에 무릎을 꿇고 코로 라틴어를 쓴다든가, 코끼리를 로프 위에서 걷게 한다든가, [[표범]]이 마구를 달고 전차를 끈다든가 했다. 심지어 사람(남녀 모두)을 동물과 [[수간]]시키는 볼거리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수간]] 문서의 고대 로마 문단과 콜로세움 항목 참고. * 동물을 사용한 범죄자에 대한 처형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형태로 진행되기도 했다. * 검투 경기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었는데, 동물을 이용한 볼거리가 첫 순서였고, 다음은 범죄자에 대한 처형, 마지막이 검투사들의 싸움이었다. 지식인층이 없애라고 계속 요구한 것은 물론 두번째였다. * 검투 경기가 금해진 후 유일하게 남은 볼거리인 [[전차경주]]의 인기가 급상승했는데, 전차경주 역시 엄청나게 위험한 스포츠였으며 관객들이 일부러 사고를 유발하는 행위를 종종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차경기는 어린애들 사이에도 인기여서 [[양(동물)]]이나 [[염소]], [[개]]가 끄는 이륜차를 타고 노는 아이들도 많았다. 전차경기에서 [[전차]]가 트랙을 도는 회수는 가로대 위에 매달려 입에서 물을 뿜는 [[돌고래]]를 뒤집고, 가로대 위의 공을 밑으로 내리는 것으로 표시했다. 영화 [[벤허(1959년 영화)|벤허]]에서 실감나게 볼 수 있다. * [[아즈텍 제국]]의 [[아즈텍 제국/인신공양|인신공양 방식]]으로 검투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전쟁신인 우이칠로포치틀리에게 제물을 바치는 방식이 포로와 아즈텍 전사가 검투 대결을 벌이게 하는 것이었는데 살찌워 잡아먹을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양상태와 장비가 형편없고 움직임이 불편하게 묶어놓는 패널티까지 주는 등 포로가 이길 확률은 희박했으나 실제로 완전무장한 아즈텍 전사를 죽이고 상으로 [[재규어 전사]]로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