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검투사 (문단 편집) == 유래 ==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BC 1세기에 [[고대 그리스]] [[역사가]] 니콜라오스는 본래 [[에트루리아]]의 제사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썼다.[* 죽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장례식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한 세대쯤 후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BC 310년에 [[캄파니아]]가 삼니움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기록에서 에트루리아설과 캄파니아설이 계속 번갈아 나오는데, 현재는 로마식 검투 경기 자체는 캄파니아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검투사가 되는 자격 조건은 따로 없었다. 초창기에는 [[포로]]나 [[노예]]를 검투사로 훈련시켜 죽고 죽이게 했지만,[* 서기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나서 로마로 끌고 온 다키아족 포로들 중 일부가 [[콜로세움]]에서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검투사 역할을 맡아야 했다. 5만 명 전원을 검투 노예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며칠간 경기를 치러도 될 정도로 수가 많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일반 시민들도 검투사로 자원하여 프로모터와 계약을 맺고 직업으로 삼거나 심지어 [[귀족]] 자제들도 검투사를 업으로 삼는 등 흐름이 많이 바뀐다. 물론 자유민 검투사는 엄연히 계약 선수이므로 모든 조건을 알려주고 상호 합의한 뒤에야 경기에 나갔다. 극단적으로는 [[콤모두스]] '''[[로마 황제|황제]]'''가 경기장에서 직접 싸운 사례도 있는데, 황제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살상을 금하고 한쪽이 항복하면 끝내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다만 콤모두스가 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누가 봐도 뻔한 봐주기 경기가 아니라 상대 검투사가 죽어라고 싸워도 답이 없어서 항복하는 식이었다고. 그 정도로 콤모두스는 검투사로써 매우 강했다.] 실력 좋은 검투사는 요즘의 [[연예인]] 내지 스포츠 스타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화산]]이 터져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지만, [[폼페이]]에는 셀라두스라는 [[트라키아인]]에 대해 '''여자들이 사모하는 남자'''라고 쓴 낙서가 남아 있다. 그러니까 여성 팬을 거느렸다는 소리. [[스파르타쿠스]] [[제3차 노예 전쟁|반란]] 등이 일어나기도 한 것을 보면 노예 출신인 제정 이전의 검투사들의 삶은 자유민 출신의 후대의 검투사에 비한다면 비참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이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은 진압하러 온 [[로마군]]을 격파하고, 생포한 로마군 포로들에게 자신들이 당했던 검투 경기를 시켜서 복수했다고 한다. 이건 복수 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식이기도 했는데, [[원로원]]은 이 부분에서도 분노했다. 이런 추모 경기 등은 높으신 분들만 주최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Uri, vinciri, verberari, ferroque necari >몽둥이로 맞고, 쇠사슬로 묶고, 불로 지지고, 칼로 죽여도 좋다.[* Sacramentum gladiatorium, Petronius Satyricon 117] 제정 후대의 검투사들의 생활과 취급도 제정 전에 비하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가 [[연예인]] 취급을 받은 것은 맞지만, 현대와는 달리 로마는 배우를 비롯한 연예인이 최하층 천민 취급을 받았던 사회였고 검투사의 신분도 다르지 않았다. 사실 현대에서도 성공한 스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예인은 밤무대 가수 정도 수준의 사회 최하층이다. 한국의 직업별 평균소득 리스트를 보면 당당하게 최하위를 차지하는게 연예인이다. 이들은 지원할 때 위 인용구와 같은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는 스스로를 타인의 종으로 낮추고 로마 시민권이 있다고 해도 시민권이 제공하는 권리를 포기한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The Roman Games, Alison Futrell, 2006] 자유민 검투사가 가질 수 있는 권리의 일반적인 상한선은 스스로 싸울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였고, 경기장에 나가기를 거부할 권리는 있지만 일단 나가면 상대에게 죽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권리의 상한선을 획득한 최고참 검투사(auctorati)조차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에게 공연을 하여 돈을 버는 연예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신분상으로는 자유민일지언정 그 이상의 법적인 보호를 받지는 못했다.[* De Speculates, Tertullian, 22, cited by Futrell, 2006.] 제사 의식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이나 추모 경기, 처형식 행사등으로 자주 치러졌다는 점을 들어 검투 경기를 [[인신공양]] 풍습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