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르마니쿠스 (문단 편집) === 후계자로 발탁 === 아버지 드루수스가 사망한 후, 가족과 로마로 돌아와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다. 따라서 수많은 야심가들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로비를 하고, 아우구스투스 역시 그녀를 결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3남매를 제 손으로 키웠다.[* 당시 로마 상류층 귀족들이나 황실 여성들은 살면서 평균 3번 정도 결혼했으며, 자녀를 낳은 경험이 있는 젊은 상류층 부인들은 재혼상대로 인기가 높았다. 이런 까닭에 아우구스투스는 조카딸 소 안토니아(게르마니쿠스의 어머니)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재혼을 명령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이부언니들과 달리 자녀들을 홀로 키우겠다면서 모두 거절한 채 70대의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자녀들과 손주들을 키우며 홀로 살았다. 실제로 그녀의 이부언니들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경우, 각각 2번, 3번의 결혼을 했다.] 발굴된 비문, 고대 기록들의 공통된 이야기에 의하면, 게르마니쿠스는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기대에 늘 부응하는 아들로 그 효심, 동생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대단했고 겸손함이 몸에 베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이었는데, 이런 그의 모습에 황실 식구들은 그를 대견해 했다. AD 4년, 18세의 나이가 되자 황실 가족들의 입회 아래 성년식을 치렀다. 아버지 요절 직후, 스스로 후견인이 되어 게르마니쿠스와 두 동생 리빌라, 클라우디우스에게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로 모든 책임을 다한 이는 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였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성년식에 직접 참여했고, 게르마니쿠스에게 특권을 선사받게 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18살의 나이에 아우구스투스의 추천, 원로원의 결의에 따라 재무관 자리를 선사받고 공직 경험을 위한 명예로운 길에 들어갈 기회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 서기 5년, 어릴 적 정혼 후 약혼했던 외종조부의 손녀인 1살 연하의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 이는 보통 로마 귀족이나 상류층 남성 중 공직 생활을 하게 된 남성치고는 빨리 결혼하게 된 편이었다. 이 당시 보통 게르마니쿠스 또래 상류층 남성의 경우, 10대 중후반 결혼하는 상류층 여성들과 달리 평균적으로 20대 중후반에 결혼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가 이 결혼을 일찌감치 결정지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다만, 신부 대 아그리피나는 보통 또래들보다는 많게는 4~5살, 적게는 1살 정도 늦은 나이에 결혼식을 올렸다. 게르마니쿠스가 성년식을 올리던 해, 외종조부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큰아버지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고 그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이 과정 전,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와 티베리우스의 아들로 자신이 7년간 손수 키운 소 드루수스를 마음에 두고 티베리우스를 불러 깊은 대화를 나누며 이 결정을 마무리지었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도 아내의 남동생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와 아그리파의 막내 아들. 게르마니쿠스의 아내인 대 아그리피나의 동생이므로 처남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성년식을 마치고 18세가 되자 그의 매형 게르마니쿠스처럼 명예로운 공직을 경험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포스투무스는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워낙 난폭하고 주변에서도 더이상 통제불가 상태였다. 따라서 할아버지이자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서 이 문제를 건의해 상속권 박탈 및 입양관계 파양 후, 외딴 섬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다가 티베리우스가 승계하기 전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유배지에서 살해당했다. 하지만 이때 맨손임에도 힘이 장사여서 그를 죽이러 온 백부장들이 쉽게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우려대로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포스투무스의 해방노예 클레멘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벌어졌다.]도 입양을 통해 공식적으로 율리우스 가문에 편입됐다. 따라서 이때부터 이름을 오늘날 잘 알려진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꿨고, 백부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외종조부에 의해 일찌감치 차기 제위계승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혈통이 이어지는 게르마니쿠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신 후계자로 지목한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만들고, 자신의 혈육인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고 난 직후, 아우구스투스의 아들(공식 후계자)로 전선으로 복귀하게 된 백부 티베리우스를 따라 처음으로 전쟁에 참가했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 드루수스가 공적을 쌓았고 요절한 땅 게르마니아였다. 18살에 접어든 게르마니쿠스는 이때 제왕 교육을 시작하면서, 티베리우스의 명에 따라 2년간 총사령관을 보좌하는 참모 본부 근무를 담당했다. 이후 AD 13년부터 티베리우스 대신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 전선 전체를 담당해 지휘했고, 4년 간 게르마니아 전쟁을 수행했다. 이때 그는 [[토이토부르크 전투|6년 전 일어난 참극]] 현장을 찾아갔으며 여기에서 유품들을 회수하고 로마군 전사자들의 백골을 모아 매장했다. 동시에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에 따라 2살 아래인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 드루수스]]와 모든 공직과 사제직을 비슷한 시기에 밞아나갔고, 3년마다 그와 함께 집정관 자리를 맡도록 결정내려졌으며 각종 명예와 훈장을 함께 수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이 조치는 과거 카이사르 가문의 두 후계자 가이우스 카아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 부여했던 방식과 똑같았다.] 본디부터 미남이었고 키가 컸는데, 말타기를 열심히 하여 약점인 하체를 단련해서 균형잡힌 신체를 가지게 됐다. 성품도 겸허하고 남을 배려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어 뭇사람에게 호감을 주었기에 일찍부터 기대와 신망을 한몸에 모았다.[* 게르마니쿠스의 성격과 성품은 아버지 드루수스와 비슷했다. 드루수스는 본래부터 다정다감하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데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매우 사랑했고, 두 사람의 사이도 친부자 관계보다 돈독했다고 한다.] 단순히 정해진 후계자였기에 생긴 현상은 아니었으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일부는 티베리우스 대신 그를 황제로 세우고 싶어했고 게르마니아에 주둔하던 로마의 군단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이 대안으로 생각했던 건 당대엔 아직 뚜렷한 전공도 없었던 게르마니쿠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