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르마니쿠스 (문단 편집) === [[게르마니아 전쟁]]과 [[오리엔트]] 파견 ===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혈육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 후임 게르마니아 전선 사령관에 임명했고, 그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자신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의 업적을 본받고, [[아르미니우스]]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고자 했다. 특히, 그는 자신과 아버지로 대표되는 카이사르 일가를 지지하는 군대의 사기를 회복하고자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티베리우스가 즉위했다. 그런데 새황제 즉위 후, 판노니아와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군단병들이 티베리우스를 상대로 항명성 반란을 일으켰다. 항명 주동자들은 서로 교감을 통해 합동으로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요구는 모두 동일했다. 왜냐하면 항명 원인은 양쪽 모두 군단병들의 형편없는 급여, 장기복무 그리고 로마군 내에서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구타와 학대가 일상적인 기강잡기라는 명목으로 방치됐던 일이 복합적으로 터지면서 거론됐기 때문이다. 이때 젊은 게르마니쿠스는 원로원의 결의에 따라 게르마니아 지방의 레누스 일대로 파견됐는데, 이성을 잃어버린 레누스 일대 병사들을 달래기 위해 그는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복합적인 이유로 항명을 저지른 군단병들에게 통하지 않아, 게르마니쿠스가 연극을 꾸며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방식을 사용해 여론을 움직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 역시 완벽하게 먹혀들지 않아, 게르마니쿠스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약속까지 밝혀야만 했다. 이렇게 병사들에게 충성과 인기를 다시 얻은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4년부터 게르마니아 정복 시도를 재개했다. 게르마니쿠스가 이끈 서기 14년부터 16년까지의 게르마니아 전쟁은 총 세 번의 원정으로 진행됐는데, 그는 아버지 드루수스처럼 울창한 숲과 늪지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병력 이동, 물자 수송 문제를 해결코자 해군을 이용했고 원정 내내 군사적 모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아버지 생전 개선군단으로 활약했던 레누스 일대 군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게르마니아를 공격하여 큰 공적을 세웠고, 게르만족에게 빼앗긴 3개의 군기 가운데 2개를 되찾았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서기 41년 초, 게르마니쿠스가 전선 사령관에 임명되기 전부터 아우구스투스와 논의를 통해 레누스와 다누비우스를 경계로 한 방어선 등을 결정한 듯 했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계속되는 전쟁이 제국의 제한적인 인력을 소모시키고 인적, 물적 부담까지 있다고 판단했던 듯 하다. 이는 원로원이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이 문제를 언급하며 가진 비밀회담을 통해서도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전공이 확실해지자 레누스와 다누비우스를 경계로 한 게르마니아 방어선을 확정짓고 게르마니쿠스에게 개선식의 영예를 안긴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수도 로마에서 [[개선식]]을 올렸는데, 이 행사는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쥐고 난 이후 열린 개선식 중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명을 내려 그를 제국 동방으로 파견했는데, 게르마니쿠스가 대강 마무리 지은 서방에는 그의 파트너인 소 드루수스를 파견했다. 이 결정에 관해, 과거 로마사 연구자들은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된 고대 로마인들의 주장을 살려 티베리우스가 법적 아들로 조카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를 견제코자 벌인 일이라고 해석했다. 그렇지만 20세기 이후, 연구자들은 여러 증거 등을 기반으로 티베리우스의 이 조치를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평한다. 더욱이 게르마니쿠스의 파트너인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보다 정치, 행정적 능력과 후계자 훈련 측면에선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이 인정한 인재였고, 로마 입장에선 판노니아, 일리리쿰, 달마티아로 이어진 다누비우스 강(오늘날의 다뉴브 강) 방어선 및 행정체계 정비 사업이 필요해,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으로 보내 새로운 공적을 쌓고 차기황제로 확고히 올라서는 것이 매우 좋은 조치였다. 즉, 티베리우스 입장에선 선황 아우구스투스가 본인을 차기 황제로 내정하면서, 로마 사회에서 고령인 본인의 후계구도 완비를 위해 게르마니쿠스&소 드루수스 쌍두 체제가 필요한 사정을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동방으로 떠나기 전, 백부이자 양부인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공동으로 키르쿠스 경기장에서 오락 경기들을 주최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짠돌이로 이런 것에는 돈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과거 행보와 달리, 두 사람을 위해 막대한 돈을 풀고, 두 사람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얼굴로 홍보하면서 로마와 이탈리아 내 로마인들의 관심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이름으로 주최한 오락 경기 당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주최한 대회들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임하며 민중들과 함께 했다. 두 사람은 본래부터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호감을 얻은 미남들이라서,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라는 후광을 제외하더라도 그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니, 티베리우스 치세 아래에서 오락 축제가 축소되어 불만이 쌓인 민중들의 열기와 지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이 행사 기간 동안 게르마니쿠스는 소 드루수스와 함께 일반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둘은 민중들이 원하는 요구사항이 합리적이라면 그 자리에서 수용해주면서 그들의 불만 사항까지 해결해줬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의 인기는 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이라는 점에서 크게 높아졌고, 모든 로마인들은 게르마니쿠스와 드루수스를 칭송했다. 이 당시 로마 사람들은 두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신화 속의 쌍둥이 [[카스토르]]와 [[폴룩스]] 형제에 빗대 찬사를 보냈다.[*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는 사촌동생이자 양형제지간이며,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리빌라의 남편이었는데 민중들은 두 사람을 라이벌 정도로 생각했지만 둘은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가 돈독했다.] 이렇게 되자 평소 이런 행사 등에 있어 열정을 보이지 않던 티베리우스는 크게 만족해, 이런 여론에 즉시 반응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두 후계자의 인기를 확고히 하고자, 아들과 조카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들을 주조해 배포하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대한 선전을 강화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인기는 이들이 죽은 뒤에도 계속 로마인들의 뇌리에 남게 됐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서의 오락 경기가 마무리된 직후, 게르마니쿠스는 [[황태자]] 내지 공동황제에 버금가는 자격으로 제국 동방의 군 지휘권을 부여받는다. 이때 원로원과 티베리우스는 그에게 아르메니아 문제와 대 파르티아 정책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기면서, 동방 일대 총독들을 총지휘하는 시리아 총독까지 그 직속 부하로 다루는 동방 최고 책임자 직을 내렸다. 이 직책은 과거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카이사르]] 정도만 부여받은 건데, 모든 로마인들은 서방에서 좋은 성과를 낸 게르마니쿠스의 파견을 최고의 선택으로 여겼다. 이 기대처럼 게르마니쿠스는 휼륭한 능력을 곧바로 증명했다. [[소아시아]]로 임지를 옮긴 직후, [[카파도키아]] 등을 병합해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을 로마 직할로 만들었고, 아르메니아 문제를 잘 해결해 아르메니아를 보호국으로 묶어 두고 이 부분에 민감한 파르티아와의 관계 개선 및 설정에서도 진일보한 성과를 냈다. 이는 게르마니쿠스의 장인이었던 아그리파, 젊은 시절 동방으로 떠났던 티베리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외엔 보여주지 못한 큰 성과였다. 그렇지만 이런 성과 뒤에는 수면 아래에서 벌어진 문제로 갈등의 불씨가 커지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7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새로운 시리아 총독으로 보내, 게르마니쿠스를 후방에서 돕고 고문 역할을 하면서 게르마니쿠스가 세운 공적에 방점을 찍길 바랬다. 그런데 새로운 시리아 총독으로 파견된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자신에게 맡겨진 고문 역할을 남용해, 사사건건 게르마니쿠스와 충돌했다. 이는 티베리우스의 의도와 다른 결과였다. 피소의 이런 행동들은 단순한 충돌 수준이 아니었고, 게르마니쿠스가 내린 결정과 정책들을 비판하고 뒤엎는 일들이 많았다. 이는 황제와 원로원의 결의 아래, 게르마니쿠스가 동방 최고 책임자라는 공식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명백한 명령 불복종이며 불경죄에 해당됐다. 더욱이 피소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딴죽을 거는 것을 넘어, 게르마니쿠스와 개인적, 성격적으로도 그 사이가 최악이었다. 이렇게 되니 동방에서 중요 문제를 판단, 결정하는 두 사람의 충돌이 큰 문제로 부상했다. 더 큰 문제는 게르마니쿠스와 피소의 관계가 원수가 된 상황에서, 피소의 아내 플랑키나와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 사이까지 견원지간이 됐다는 점이다. 부부가 쌍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젊은 황태자와 총독 겸 고문의 관계 개선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게르마니쿠스는 19년 초 황제령 아이깁투스([[이집트]])를 티베리우스의 허락없이 방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로마 최고의 곡창지대인 이집트는 전임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황제 개인영지가 된 이래, 황제와 이집트 장관의 허락없이는 누구라도 입국이 금지된 땅이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이 문제로 티베리우스에게 호된 질책을 받고,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리아 총독인 피소가 이 문제를 꼬투리삼아 게르마니쿠스를 비난하고 딴지를 걸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매우 심각해졌다. 다행히 게르마니쿠스는 인격자답게 이 상황에서도 엄청난 인내심과 특유의 인격을 발휘해 그 갈등을 확대시키지 않았다. 이는 게르마니쿠스를 평생 인기있게 했고, 사후에도 오랫동안 추앙받게 한 특유의 인격이 발휘되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다행이었다. 비슷하게 로마와 이탈리아에선 소 드루수스와 [[세야누스]] 간의 대결이 심각해져, 몇 년 후 소 드루수스가 참다 못해 자기 앞에서 매를 벌면서 깐족거린 세야누스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때려 눕혀 거의 반주검으로 만들 뻔한 것을 생각해보면, 게르마니쿠스의 인내심이 상상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게르마니쿠스는 상명하복과 연장자 우대를 중시하는 로마인들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그 인내심이 대단해 피소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도 모두 넘어갔다. 어느 정도로 그 인내심과 행동이 훌륭했는지, 게르마니쿠스는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피소가 자신을 대놓고 깎아내리며 누명을 씌우는 상황에서도, 전혀 화내거나 반론하는 일 없이 묵묵히 다 듣고 참으면서 견디는, 그 나이 치고는 믿을 수 없는 인내심을 보였다. 이후에도 그는 피소의 지시를 바로잡을망정 절대로 피소를 욕하지 않았다. 이러니 피소에 대한 여론은 더욱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고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평가만 올라갔다. 이렇게 되자 피소는 자신의 명성이 실추됐다고 생각해, 게르마니쿠스를 더 미워하게 됐다. 때문에 피소는 안티오키아 총독 관저에서 상관 게르마니쿠스를 대놓고 무시한 다음 항명성으로 상관 게르마니쿠스를 떠나버린다. 이는 사상 최악의 사태였는데, 그럼에도 게르마니쿠스는 피소를 불경죄로 체포하지 않고 대단한 인격과 자제력으로 기다려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