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견당사 (문단 편집) ==== 그 밖에 ==== 일본은 견당사를 파견한 것을 당나라와의 조공-책봉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당에 입조를 하였고 이후 여러차례 사신을 보냈기 때문에 형식적으론 조공-책봉의 성격을 띠었다. 당나라로 가는 해로는 크게는 두가지로 나뉘는데 초기 견당사는 주로 북로(신라로)를 이용하다가 한반도의 정세 변화로 702년에 [[동중국해]]로 가로지르는 남로를 개척하여 이후 남로를 이용했다. 그런데 남로는 한반도를 피해서 남해바다 외해를 직통하는만큼 폭풍우가 몰아치는 등 잦은 기상 여건의 악화로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간에 제주도에 표류해서 신라 경주에 사신을 보내 살아남은 사람을 데려온 적도 있다. 그래서 기상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남도로라는 추가 해로를 개척해 이용하였다. 그리고 딱 한 차례에 발해로를 이용했는데 [[동해]]로 북상하여 동경용원부와 [[상경용천부]]를 경유한 뒤 유주로 입경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때는 759년으로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화북 지방이 전란으로 뒤덮여 있었다. ~~흠좀무~~ 견당사는 2척에서 4척으로 편성되었고, 한 회에는 500명이 승선하기도 했으나 평상시에는 100명 내지는 130명까지 승선했다. 속일본기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은 견당사뿐 아니라 견신라사, 견발해사 등 주변 다른 국가로 보내는 사신단도 운영했고, 심지어 [[보덕국]]에 보내는 견고려사, [[탐라국]]에 보내는 견탐라사도 보낸 적이 있다. 견신라사 같은 경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지도에 반해서 실제론 의외로 상당히 활발하게 교류했는데, 670년 이후로만 40여차례 보낼 정도라 견당사보다도 그 규모가 컸다.[* 또한 후대의 비슷한 교류형태인 [[조선통신사]]와 비교하면, 견신라사가 횟수에서 넘사벽으로 잦고 활발했다.][* 애초에 지리적으로 일본에서 한반도로 가는 게 일본에서 바로 중국대륙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가깝기 때문에 교류 횟수가 견신라사가 견당사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현대 일본의 역사교육에서는 여러 이유로 견당사만을 부각시키고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당나라로 견당사를 보내는 바닷길 중간쯤에 [[탐라국]]이 있다보니, 견당사를 탐라인들이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측 사학자인 나카무라 신타로(中村新太郞)의 저서에서는 “일본이 당나라에 보내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가 상주(上奏)한 조건 중에 일본해에서 신라 해군에게 피습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견당사(遣唐使)를 폐지하여야 한다”고 까지 했다.[* 日本と中國の2千年 260(面).] 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아마도 [[신라구]]나 탐라인들의 습격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분류:조공·책봉 사절]][[분류:일본의 역사]][[분류:신라]][[분류:중일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