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견직물 (문단 편집) === 한국에서 === * 삼국시대 한국에서도 근대 이전까지 당연히 옷감 및 [[종이 이전의 기록매체|중요 문서 기록용]]으로 써왔으며, 국가에서 양잠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부터 누에치기를 권장했다고 나오며,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 따르면 신라는 3년에 한 번씩 [[뽕나무]]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면서 관리할 정도로 비단 생산과 관리에 국가적으로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민정문서에 따르면 가령 사해점촌[* 오늘날의 [[충청북도]] [[청주시]] 일대] 마을의 뽕나무는 1004그루였는데 3년간 심은 것이 90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기록된 다른 나무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 조선시대 조선 시대에는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 의식을 통해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기도 했다.[* 친잠은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권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 황실]]에서는 오늘날도 황실 여성들이 친잠을 하여 그 비단으로 [[기모노]]를 지어 입기도 한다.] 조선 시대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에 따르면 큰 집에는 뽕나무 300그루, 중간쯤의 집에는 뽕나무 200그루, 제일 작은 집에는 뽕나무 100그루를 심도록 했다. 만약 규정대로 심지 않으면 그 지역의 수령을 파면했다. 서울 [[마포구]] [[절두산]] 순교성지는 형세가 누에 머리를 닮았다 하여 옛 지명이 잠두봉([[蠶]][[頭]][[峰]], 누에 머리 산봉우리)이었으며, 산 아래에 뽕나무밭을 조성해 누에가 뽕잎을 먹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절두산 순교성지 아래에 [[잠원동]]([[蠶]][[院]][[洞]])이란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명에 있는 누에 잠([[蠶]]) 자를 볼 것.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양잠을 하던 잠실([[蠶]][[室]])이 2군데 있었는데 서울 [[잠실동]]과 [[잠원동]] 근처였다.[* 잠원 역시 원래는 잠실이라 불렸으나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송파구]] 잠실동과 구분하기 위해 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04951&mobile&categoryId=2246|#]] [[잠원역]] 승강장에는 벽에 타일 모자이크로 누에가 그려져있다. 한편 서울 [[성북동(서울)|성북동]]에 선잠단([[先]][[蠶]][[壇]])을 세워 음력 3월 사일([[巳]][[日]]) 중 길한 날을 골라 서릉([[西]][[陵]])씨[* 중국 전설에 따르면 서릉씨는 황제 헌원의 부인이다. 어느 날 서릉씨가 뽕밭 아래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데 야생 누에의 고치가 찻물 속으로 떨어져서 서릉씨가 고치를 꺼내려 하자 실이 줄줄 풀려나오는 것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누에고치에서 처음으로 비단실을 자아 헌원씨에게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한다. 이 전설 때문에 서릉씨를 처음으로 양잠을 시작한 자, 양잠의 시조로 기렸다.]에게 제사를 지냈다. 당시에는 선농단 제사와 마찬가지로 선잠단 제사도 중사([[中]][[社]])로 등급을 매겨 순위가 꽤 높았으니, 조선이 그만큼 양잠산업을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순종 2년(1908)에 서릉씨 신위를 선농씨 신위와 합치면서 선잠단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당연히 제사 자체가 사라졌다. 광복 후에는 문화유산 체험 차원에서 선잠단 자리에서 왕실 제례에 맞춰 제사를 매년 거행한다. * 현대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방 하나에 누에를 키우고 아이들이 뽕잎을 해와서 먹여다 고치를 공장에 팔았고 부산물로 [[번데기]]도 생산되었으나 [[농약]]의 사용과 가격도 품질도 월등한 중국산 비단[* 그럴 만도 한 게 아직도 세계 1위의 비단 생산국은 중국이다. 애초에 비단 산업의 원산지이자 발상지이기도 하고.]으로 인해 국산 비단은 사실상 숨통이 끊겼고, 과거 비단실을 잣던 누에들은 이제는 [[동충하초]] 등 건강식품 용도로 전용된다. 현대에는 각종 섬유 기술이 매우 발달해서 비단을 재료로 한 옷의 실용적 이점도 덜하고 양 자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비단 자체의 아름다움과 희소성 때문에 고급 옷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하긴 했어도, 어찌어찌 살아남은 소수 양잠업체들이 국산이라는 것을 메리트로 버티고 있긴 하다. 혼수를 맞추러 가면 흔히 천연염색한 국산 전통 손명주 한복이라면서 추가금을 받는데, 택도 없다. 전통 베틀은 폭이 좁아 치마 한 단이 35 cm를 넘길 수 없다. 수입산 개량 직기는 36인치(90 cm)까지 수제작이 가능하지만 직조는 폭이 늘어날수록 작업 난이도가 높아진다. 평생 직조만 해 온 장인도 한벌 분량을 짜려면 최소 열흘이 걸린다. 인건비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걸 알 수 있다. 만약 대여라면 명주가 맞는지부터 의심하자. 실크는 인체의 분비물에 약해 몇 번만 대여해도 폐기해야 하는데 바느질도 합성 섬유보다 훨씬 어렵다. 양심적으로 진짜 견직물을 쓰는 업체가 몇이나 될까? 광택과 구김성, 옷깃의 바랜 정도, 바느질 구멍 등을 잘 보자. [[인간문화재]] 조옥이 선생[* 생몰년도: 1920. 05. 27 ~ 2007. 10. 30]이 살던 경상북도 상주시가 명주로 유명하며 상주시 함창읍에는 명주박물관이 존재한다. 2006년부터는 상주 명주 패션 디자인 패스티벌도 매년 개최하고 있을 정도. 다만 조옥이 선생의 작고 후 전통 방식은 사장되었고, 모두 기계화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가 실크로 유명하며 한국 비단의 70~80%를 생산하고 있다. 1970~80년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진주에 찾아와 사갈 정도로 매우 인기가 많았다. 경상북도 경주 두산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사)두산손명주연구회를 만들고 국가무형문화재 인정을 받았다. 현재로서는 전통 명주가 생산 및 판매되는 유일한 지역. 경주시전통명주전시관에서 시연을 보이고 있으며, 시티투어 코스에도 포함되어 있다. 주민들이 만든 손명주 판매도 하는데, 한 필에 80만원 정도.[* 2017년 당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