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결투 (문단 편집) === 사회적 이유 === 결투 문화는 유럽의 [[잉여]] [[귀족]] 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시대에 따라 놀고먹으며 돈도 없는 귀족이 늘어날수록 결투가 증가했다. [[18세기]] 이전은 전 세계의 유아 사망률이 50%가 넘었는데,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영양 수준이 높았고 청결한 환경을 유지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유아(0~5세) 생존률은 평민들보다 항상 높았다. 평균 수명도 귀족층이 훨씬 길었다. 평민들이 40~50대에 죽고 60세까지 살면 장수했다고 불리던 시절에도 귀족들은 70세 이상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늘어난 귀족들은 평소에는 놀고먹는 대신, 전쟁이 발발하면 [[장교]]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으로 밥값을 하였다. 이는 사자 무리인 [[프라이드]]에서 숫사자가 평소는 놀고 먹다가, 다른 사자와의 싸움이나 다른 맹수(하이에나, 곰, 늑대, 인간)의 싸움에서 앞장서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구 밀도가 높고 자원이 제한된 지역에서 전쟁은 끊이질 않았고,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엔 귀족의 수가 남아 돌았지만, 전쟁의 시기에는 글을 읽고 검술을 배운 귀족들이 매우 필요했다. 병력을 지휘할 [[장교]]로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장교들이 어떤 식으로건 죽어서 수가 줄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전쟁이 있다면 사회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포로로 잡힌 귀족은 역시 귀족인 상대 장교들에게 우대를 받았으나, [[전쟁]]이라는 게 애초에 죽고 죽이는 판이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공격은 항상 지휘권을 쥐고 있는 장교, 즉 귀족에게 집중되었다. 역사적으로 항상 전쟁터에서 장교의 사망률, 특히 초급 장교의 사망률은 사병보다 높았다. 포로로 잡히면 우대받았지만, 전쟁터에서까지 사병은 사병끼리, 장교는 장교끼리만 치고받으란 법은 없었다. 게다가, 낮은 신분의 사병들이 자국 귀족 상관들에 대한 불만을 역시 귀족인 적 장교-- [[프래깅|혹은 아군 장교]]--를 교전 중 공격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오랜 기간 없으면? 군대가 자연스럽게 축소되고 장교 일자리가 줄어든다. 영지로 돌아가도 토지는 결국 제한되어 있고 (대체로)후계는 장자의 몫이다. 결국 많은 실업자 귀족들이 양산되었고, 실업자 처지가 된 귀족들의 불만이 커졌다. 그렇다고 생업에 뛰어들자니 귀족 체면에 평민들이 하는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체면을 포기해도 일할 곳도 별로 없었다. 삶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던 4대 학문인 [[신학]], [[의학]], [[법학|법률학]], [[철학]] 등을 배워 [[성직자]]나 [[교수]] 등이 되는 것은 당시에도 귀족 체면을 망치지 않는 거라 여겨졌고 힘도 없고 땅도 없는 귀족들은 대학에 가서 공부했다. 중세시대 [[대학]]의 탄생이다. 다만, 당시 대학 교육엔 돈이 매우 많이 들어서, 보통 재산이 풍족한 귀족 집안에서 차남 이하 아들들에게 지원을 해 집에서 내보내 자립시키는 용도로 많이 애용됐다. 왕 밑에 들어가 고급 [[관료]]가 되는 것은 급여를 받더라도 체면을 구기지 않았지만 자리가 적었고, 하급 관료는 귀족이 하기엔 부적합한 일로 여겨졌다. 일부 권력에 욕심없고 집안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차남 이하들 중 몇몇은 장남인 형 밑에 들어가 영지의 관리 등을 맡으며 가문에 남기도 했지만, 역시 가문에서 모든 형제들을 다 끌어안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형제간 권력 다툼이 날 여지가 컸다. 이런 길도 갖지 못한 잉여 귀족들은 당연히 반란을 모의했고, 왕은 이런 반란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이들의 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줘야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결투다. 상술한 이유로 결투가 항상 귀족들에게 유행한 것은 아니며, 시대상에 따라 유행이 되었다가, 어리석은 행동으로 비춰졌다가를 반복한다. 전쟁 중이거나, 전쟁의 위험이 심각할 때는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젊은 혈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춰졌고, 전쟁 영웅이나 군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으로 생각되었다. 당연히, 상시 전쟁터에 제일 먼저 나갈 준비를 하는 신분인 군 장교에게 결투를 신청한 비장교 신분의 상대도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거나 모욕해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애초 결투의 주 유래 중 하나가 귀족의 개체수 조절(?)이었으니, 조절 대상으로 자진해서 대기 중(?)인 장교를 결투로 없애는 건 비매너에 속했다. 장교들간의 결투도 큰 싸움 앞두고 어차피 죽으러 갈 걸 뭐하는 짓이냐며 주변에서 말리는 편이었다. [[사법부|사법제도]]도 시대 상황에 맞춰 원칙 없이 굴러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30년 전쟁]] 후 인력난이 극심한 때의 독일의 대부분의 주에서는 사형을 사실상 폐지하고 무기 노역형 또는 무기 군 복무형을 신설했다. 당장 일하거나 싸울 사람이 없으니 죽일 놈도 안 죽이고 죽을 때까지 부려먹겠다는 소리다. 부족한 인력 때문에 사형제도조차 폐지할 지경이었으니 결투도 당연히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그리고 전염병이 돌거나 기타 특별한 이유 등으로 귀족 인구가 부족할 경우 그리고 그 인물이 중요한 업무를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남자 후계자가 하나뿐인 귀족 집안에 결투를 신청할 경우, 모욕 수준이 사회적으로 도를 넘었다고 납득할 수준이거나 평소 남자 후계자의 집안이 망해도 싸단 소릴 들을 만큼 명망을 잃은 경우가 아니면, 알고도 그랬으면 미개인, 모르고 그랬으면 이제 갓 사교계에 데뷔한 뉴비 취급 받았다. 후자는 그나마 아직 신참이라 몰라서 그랬으니 서로 사과하고 좋게 끝낼 가능성이 있었지만, 전자라면 사교계에서 매장되는 걸 각오해야 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도저히 모욕을 참을 수 없어 귀한 집 자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면 이 경우 결투를 신청받은 귀한 아들은 체면상 나가더라도 주변의 다른 명망가들에게 입회인으로 나와 달라고 요청했다. 입회인들은 결투에 찾아가서 '쟤네 아들 하나뿐인 거 알지? 니가 죽이면 쟤네 집안은 어떻게 하라고?'와 같은 식으로 말하면서 어떻게든 서로 화해하도록 말렸다. 반대로 그 유일한 남자 후계자가 결투 신청자인 경우에도 신청자에게는 "너네 집안은 어쩌려고 그래, 머리 좀 식히고 말로 하자.", 결투를 신청 받은 사람에게는 "저 친구가 좀 흥분해서 그런 것 같으니 거절하고 화해해라."라고 하는 등 주위에서 최대한 말렸던 듯하다. 어차피 외아들일 경우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명분이 있어서, 이를 핑계로 결투 직전까지만 간 뒤 "내가 외아들만 아니었으면 끝까지 갔겠지만 어쩔 수 없이 참는다."라고 중간에 관두는 식으로 체면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이를 거부하고 외아들에게 계속 결투를 종용하는 상대는 대개 알아서 사교계에서 매장됐다. 이 외에 결투 신청 대상에 부적합하다 여겨졌던 유형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금수저|귀족 중에서도 특출하게 귀한 집 자손]], 결투가 벌어지는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중요인물이나 존경받는 인물, 대가족의 아버지, 전쟁 영웅 등등. 그리고 [[전염병]]이나 [[전쟁]] 등 나라의 위기가 닥친 때라면 그냥 결투 신청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간주되었다. 이런 때 결투 신청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결투에서 서로 손해보는 살인을 피하는 방법은 보통 먼저 총을 쏘는 결투 신청을 받은 사람이 엉뚱한 곳에 총을 쏘거나 칼을 휘두르지 않거나 해서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싸울 의사가 없는 상대편에게 공격을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또 결투 이후의 평판을 생각해서 총 안 쏘고 화해하거나 마찬가지로 엉뚱한 곳에 발포하거나 칼을 내리고 끝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암묵적인 룰을 처참하게 깨버려서 두고 두고 까인 게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를 벌인 [[에런 버]]이다. 현직 [[부통령]]인 에런 버에게 결투 신청을 받은 [[알렉산더 해밀턴]]은 전직 미국 [[미국 재무부|재무장관]]이었고, 아들을 결투에 잃은 아픈 과거도 있어서 결투를 혐오했지만 당시 신사의 체면을 위해 나갔다. 해밀턴은 이후 자신이 저지른 무례를 사과할 생각으로 총을 일부러 빗맞췄고[* 적어도 자신은 일부러 빗맞췄다고 주장했다. 어디까지나 해밀턴 자신의 주장이지만, 일단 당시에는 해밀턴의 주장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졌다.] 분노심에 불타던 에런 버는 이런 거 신경쓰지 않고 해밀턴을 쏴서 죽였다. 그리고 버는 법적으로 처벌받진 않았어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다. 결투가 흔하던 그 시대에도 충격적이고 예의없는 행동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중요 인물, 아들 귀한 집 자식은 결투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예의상 하는 시늉만 한다.'는 [[불문율]]로 꽤 엄격하게 지켜졌던 거 같다. 어떤 경우는 결투 당사자 모두 죽고 다치는 게 무섭긴 한데 체면상 결투를 취소할 순 없으니, 암암리에 서로 합의를 하고 결투 현장에서 적당히 싸우는 척을 한 뒤 명예가 회복됐다며 화해하고 치우기도 했다. 결투 자체에 "나는 내가 당한 모욕을 참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의의가 있으므로, 승패에 따라 명예가 갈리거나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결투에서 이긴 쪽이 옳고 진 쪽이 그르다는 식으로 결론나는 경우는 결투 재판이 아닌 한 거의 없었다. 산 쪽은 산 대로, 죽은 쪽은 죽은 대로 '''모욕을 참지 않고 명예를 목숨을 걸고 지킨''' 이들로 인정받았다. 시간이 지나서 인구가 넘쳐나고, 다시 귀족도 많아지자 이젠 '낭만적'이라며 결투가 허용되었고, 재판 결과가 애매할 경우에는 결투로 재판하는 걸 권장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투가 가장 많아진 것은 의외로 근대에 가까운 18세기 이후에서 19세기 초반인데, 이때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들도 귀족들과 비슷한 이유로 결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을 배경으로 한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결투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다만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결투장에 나서는 것은 후반부 [[에드몽 당테스|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알베르 드 모르세르]]의 결투 단 한 번으로, 소설의 중요한 명장면이다.] 이렇게 결투를 권장하는 정도로 통제가 안 될 만큼 내부의 잉여 귀족의 수가 많아져서 실업난이 닥칠 경우, 국가는 주기적으로 [[전쟁]]을 일으켜 이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렸다. 결투문화의 범람은 여러 가지로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성행한 것과 비슷하다. [[저출산]]으로 해결할 수도 있으나, 의료 체계와 위생 수준 등이 미비한 시절에 영유아 사망률이 높고 기대 수명이 낮았던 시절이라 예비 인적자원 확보 차원(?)에서라도 많이 낳을 수밖에 없었고, 문화적으로도 자녀가 적거나 없는 가정 혹은 독신자들이 편견에 시달리던 때였으니 그러기도 어려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