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결호작전 (문단 편집) == 진행 == [[대본영]]은 비교적 정확하게 미국의 본토 공격 시기를 예측하고 있었다. 대본영은 겨울이 오기 전 빠르면 45년 9월, 늦어도 11월에는 미군이 본토로 직접 상륙해올 것이라고 내다봤는데, [[몰락 작전]]의 1단계인 [[올림픽 작전]]이 실제 45년 11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침공시기를 예측한 대본영은 즉시 결호작전을 구상하고, 총 7개의 방어전선을 설정하고 담당 부대를 새로이 편제했다. * 결1호: [[홋카이도]] - 제11방면군 * 결2호: 동북부([[도호쿠]]-[[고신에쓰]]) - 제12방면군 * 결3호: [[간토]] - 제36군 및 제6항공군 * 결4호: [[도카이]], [[호쿠리쿠]] - 제13방면군 * 결5호: [[간사이]], [[시코쿠]], [[주코쿠]] - 제15방면군 * 결6호: [[규슈]] - 제16방면군 * [[결7호 작전|결7호]]: [[남한|남선]] 및 [[제주도]] - 제17방면군 및 제58군 이 중 1944년 7월에 편제된 제36군 및 제6항공군을 제외하면 모두 1945년 2월 1일자로 변경된 편제에 따라 새로 편제된 부대들이다. 아울러 이들 부대는 각 제1총군, 제2총군으로 나뉘어 제1총군이 11, 12, 13방면군을 맡아 동일본 전역의 방위를, 제2총군이 15, 16방면군을 맡아 서일본의 방위를 담당했다.[* 1총군 사령관은 [[스기야마 하지메]]가, 2총군 사령관은 하타 슌로쿠가 맡았다.] 수도 도쿄와 이를 포함하는 간토 일대는 수도권의 특수성상 1,2총군이 맡지 않고 사실상 대본영 및 육군 수뇌부의 직접 지휘하에 있었다. [[제주도(일제강점기)|제주도]]의 경우는 좀 미묘한데, 명백히 본토 결전 계획인 결호작전에 포함되었지만 일본 본토가 아니었으며, 그 소속도 [[조선군(일본 제국)|조선주둔군]]의 후신인 제17방면군에 속한 58군이었다. 이는 제주도가 본토는 아니지만 조선, 중국과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만큼 본토 침공 이전에 선제공격이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제주도 방위 계획인 [[결7호 작전]]을 본토 결전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 편이다. 이 외에 [[일본군 해군|해군]]은 항공세력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고, 본토 외 지역을 맡은 제10항공함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력을 본토에 결집하여 동일본의 제3항공함대와 서일본의 제5항공함대로 재편했다.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고 가정할 경우, 위의 7개 작전 중 [[연합군]]과 교전이 예상되는 작전은 총 4개이다. 45년 11월에 [[몰락 작전|올림픽 작전]]에 맞서야 하는 결6호의 제16방면군, 46년 봄에 조공작전인 [[몰락 작전|파스텔 작전]]을 상대해야 하는 결5호의 제15방면군, 그 직후인 [[몰락 작전|코로넷 작전]]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결3호의 제36군, 그리고 [[소련군]]의 남하에 맞서야 하는 결1호의 제11방면군이 그 대상이다. 대본영은 이를 위해 육해군 총합 500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결호작전이 논의되기 시작할 무렵에 본토 내 [[일본군|제국군]]은 50만 명도 안되었으며, 나머지 300만은 다 중국과 만주와 태평양/동남아 점령지에서 소모되고 있었다. 때문에 결호작전에 있어 최우선적 과제는 작전수행을 위한 충분한 병력 확보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해외 점령지에서 병력을 후퇴시키거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본토로 돌리겠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 1944년 중후반 마리아나 제도 및 필리핀으로의 증원을 마지막으로 일본은 사실상 중국, 남방 전선의 병력을 재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해군 전투력이 1944년에 완전히 개박살나서 수송선단을 호위할 전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 열도는 대륙과 연결되지 않은 섬이며, 대륙과 가장 가까운 곳이 한반도 동남해안과 접한 규슈 북부 및 혼슈 서부이다. 중국 전선은 고사하고 조선의 식량자원도 제대로 수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 재배치는 언감생심이었다. 설사 호위할 전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수십만 대군을 재배치할 수송선단도 없었다. 일본의 수송선단은 1942~1944년 미국 잠수함들의 공격에 의해 거의 궤멸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조선소들은 안 그래도 자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수송선 대신 전투함 건조에 집중하고 있었다. 설사 수송선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동해까지 출몰한 미국 잠수함들이 일본 본토로 향하는 수송선들을 구경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한때 일본군의 남방 최대 거점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라바울 본영]]에 배치된 정예병 20만 대군은 1945년 시점이 되면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어진 섬에 짱박힌, 그러면서도 본토 소환도 못 하는 그림의 떡 신세가 되었고 이런 식으로 남양군도, 남방 점령지, 중국 전선 등에 배치되어 쓸모없이 고사해 가는 병력이 한가득했다. 그래서 [[대본영]]은 45년 2월 28일 제1차 병비를 발표하고, 4월 2일 제2차 병비, 5월 23일 제3차 병비를 발표하여 총 54개 사단을 신설하고 [[징병제]]를 강화하여 병력을 충당했다. [[일본군 해군|해군]]도 본토 결전 준비에 착수했으나 사실 이 시점에 이르면 제대로 된 [[전함]]이나 [[항공모함]] 한 척조차 없었고,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주력함들도 미 해군에 대한 두려움과 기름의 부족으로 제대로 된 해상작전이 불가능했다. 이에 해군은 수상전투함 대부분을 해안에 좌초시켜 고정포대로 활용하고, 기동성 좋은 소형함들을 위주로 상륙함대에 대한 게릴라식 공격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또한 상륙함대에 대한 [[카미카제]] 공격도 해군이 맡기로 되어있었다. 이를 위해서 해군은 [[신요 보트|신요]], [[가이텐]], [[카이류]], [[후쿠류]] 등의 자폭병기를 연달아 개발했다. 그러나 해군의 이 최후의 작전마저 [[구레 군항 공습]]으로 거의 모든 잔존 주력함들이 가라앉음에 따라 무산되었고, 제국 해군은 와해되었다. 한편, 해안에 가까운 수도 도쿄가 미군의 직접적 침공 위협에 노출됨에 따라 유사시 황실과 정부, 대본영 등 군 지휘부를 옮기기 위해 나가노현 산악지대에 대규모 지하요새를 건설하니 이것이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kvm&articleno=1251|마츠시로 대본영]]이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항복 당일까지 완성되지 못했으나, 안 그래도 없는 물자와 인력을 마츠시로 대본영 공사에 투입하는 중이었으니 미군이 침공해올 시점인 45년 11월 즈음이면 기본적인 완성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주로 건설했는데, 이들은 패전 직후 대부분 [[우키시마호 사건]]에서 희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