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대승 (문단 편집) == 여담 == * 경대승의 청주 경씨 일족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딱히 치죄를 받지 않아 잘 먹고 잘 살다가 [[조선]] 중기에 가세가 점점 기울어 본적인 [[충청도]] 쪽으로 이주하여 [[충주시|충주]] 지방 근처에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다만 가문의 시조가 경대승의 아버지인 [[경진#s-2]]임에도 현재 종파인 '청안공파'의 후손들은 경대승의 직계가 아니다 [* 경대승의 동생이 무신정변에서 [[굴욕]]을 당한 것으로 유명한 [[이소응(고려)|이소응]]의 딸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때문에 가계가 계속 이어졌다면 현재 청주 경씨 후손들은 경대승보다는 경대승의 동생의 직계일 가능성이 높다. 경대승의 혼인과 자식 유무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 경대승의 대중적 인지도는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최충헌]] 정도를 빼면 다른 [[무신정권]]기 집권자들과 비슷하게 꽤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2000년대 이후엔 KBS 드라마 <[[무인시대]]> 등으로 경대승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면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상승한 측면은 있다. * [[이승휴]]의 《[[제왕운기]]》[* 《제왕운기》 <권하> -본조군왕세계연대-]에 따르면 경대승의 가묘(家廟)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당시 [[문하시중]]인 최홍윤[* 고려 후기 문관. 시호는 경문공(景文公)으로 [[황주량]]과 시호가 같다.]이 경대승 묘에 들러 시를 짓고 갔다고 한다. * 작품의 소재로 쓰기에도 크게 나쁘지 않은 나름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는데, 20대에 최고 권력자가 된 [[청년]] 장군, 간신배를 제거하고 조정을 다시 군왕과 문신들에게 돌려주려했던 모습, 도방 인물들과의 의리, 군신 간의 갈등과 요절 등이 그것이다. * 명종이 경대승에게 악감정을 가진건 [[정치]]적 의견도 있지만 명종의 [[질투]]심도 한 몫했다는 주장이 있다. 경대승의 경우, 개인 가산을 모으지 않았으며 문신들에게 예를 갖추는 등 당시 백성들, 反중방 무관들, 문신들로 구성된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라 명종이 시기했다는 주장. * [[정중부]]가 경대승에게 기습을 당해 그 일파가 죽게 되는 과정을 보면 정중부 정권이 가지고 있던 의외의 취약함을 꿰뚫어 본 경대승의 올인성 [[도박]]이 성공한 것이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정중부 세력은 본인들을 보위하는 군사 조직인 [[사병]] 집단이 없었거나, 있었다 한들 그 세력이 미약했다. 물론 [[중방]]의 수장이었기에 정규군을 동원할 권한은 가지고 있었지만 중방의 고위 무신들이 눈에 불을 켜고 견제하는 상황에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중부 정권이 이렇게 무너지자 경대승은 본인만의 군사 사조직인 [[도방]]을 만들었고, 경대승이 죽기 직전까지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대의를 그르치게 된다. * [[이의민]]의 행보도 주목해볼 만한데 경대승에 찍혀 대비를 한다고 자기 집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노복들을 무장시키기도 했으나 단순 노복들에 불과한 본인의 사병들은 전문적으로 전투 훈련을 한 경대승의 도방 병력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이의민은 위험한 [[개성시|개경]]보다는 기반이 있는 [[경주시|경주]]로 내려가버린다. 이의민의 아버지는 [[천민]] 출신 소금 장수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근대까지만 해도 [[소금]]은 나라에서 전매로 관리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고, 이 사실을 역으로 뒤집어보면 소금 장수를 단순하게 천민으로만 단정짓는 것은 1차원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신분]]은 낮았을지 몰라도 이의민 [[가문]] 나름대로는 소금 장사로 부를 쌓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는 이의민이 경주로 내려간 것에서도 간접적으로나마 증명되는데 이의민이 기반도 없는데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낙향한거라면 경대승 입장에서는 이의민이 개경에 있는 것보다 더 죽이기 쉬웠을 것이다.[* <무인시대>에서는 [[신라]] 부흥 세력과 연관짓기도 하는데 확고한 정설은 아니다.] 어느 정도 경주에 [[재정]]적 기반을 갖고 있었고, 개경보다는 [[안전]]하다는 판단이 있었기에 이의민이 내려간 것이라는 의견. * 《[[고려사]]》를 보면 다른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이 <[[반역]] 열전>에 실려 있는 반면 유독 경대승만은 <반역 열전>에 실려 있지 않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는 경대승이 권력을 차지한 후에도 이전의 집권자들처럼 관작을 받지 않고 나가버린 것, 개인의 재산 축적을 거부한 것,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문신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이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이 역대 무신 집권자들 중 온화적이었기에 그가 오래 살았다면 고려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상기했듯 경대승 역시 상대적일뿐 조정의 의사 결정에 간섭했고[* 사실 집권기 경대승은 [[벼슬]]을 버리고 자택에 칩거했던지라 본인이 직접적으로 조정의 의사 결정에 관여했다고 보이는 기록은 문신 우대 [[정책]] 하나뿐이다. 물론 큰 일이 있을 때는 명종 앞에 가서 알현하고 의견을 말했다고 하니 기록에 안 적혀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말이다.] 공포 정치, 도방의 횡포 방치, 정치적 지향점 부재 등 한계점 역시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또 의도치 않게 이후 최씨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반면교사가 되어준 케이스라는 점 역시 생각보다 큰 해악. 무신 정권의 계보에서 최충헌은 이의민의 계승자라기보다는 경대승의 계승자 내지는 IF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즉, 경대승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후 최씨 정권이 장기집권할 가능성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물론 무신정권 특성을 고려하면 최씨가 제거되더라도 또 다른 무신이 난장판을 피웠을 확률이 높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