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대승 (문단 편집) === 출생과 관직 진출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청주]][* 지금도 [[경(성씨)|경]](慶)씨의 본관은 청주 하나뿐이다.]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당시 지역에서 유서 깊은 군반 가문이었다. 부친인 [[경진#s-2|경진]](慶珍)은 무신정권의 제2대 집권자였던 정중부의 편에 서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다. 본디 무신 가문들 중에서도 잘 나가는 집안이었고, 정중부의 편에 서기까지 했으니 경대승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능했다고는 하나, 15세의 나이에 [[음서]]로 국왕 직속 [[친위대]]인 견룡군의 교위가 된 것은 가문의 뒷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후술되는 최홍윤의 시문에서의 묘사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직업군인으로서 어느 정도 타고난 완력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단련을 받았으리라는 점, 결사대 수십명을 이끌고 기습적으로 정권을 전복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는 점을 종합해 보면 경대승의 무용이 정말로 뛰어나기는 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인시대>에서처럼 이의민과 1:1로 장시간 겨루다 비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말이다.] 송유인의 아들인 송군수와 함께 견룡군에 속해 있다가, [[명종(고려)|명종]] 4년인 [[1174년]]에 이르러 견룡군의 지휘관에 해당하는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된다.[* 재미있게도 이 관직은 [[보현원 사건]] 당시, 사건을 주도했던 무신정권의 첫 집권자 '''[[이의방]]의 관직'''이기도 하다.] 가문의 덕을 보아 출세길에 오르긴 했으나, 경대승 본인은 정중부의 곁에 선 아버지 경진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경진은 청주 사람들의 전답을 빼앗아 사리사욕을 채우기로 유명했는데, 아버지가 사망한 뒤 청주 [[사심관]]의 직위를 계승한 경대승은 아버지가 탈취했던 모든 전답을 청주 백성들에게 돌려주어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고, 백성들은 입을 모아 경대승을 칭송하였다. 다만 이때 자신과 경씨 가문이 원래 지녔던 전답까지 국가에 모조리 환속해버려서, 항상 1식에 2찬으로 생활하였고, 내내 생활고로 고생하게 된다. 사후 가산을 정리해보니 집 한 채, 쌀 몇 섬, 말 먹이뿐이었다고.[* 이렇다 보니 살림살이가 돌아가질 못하여 가신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집도 허름하여 수하인 [[도방]] 장사들이 누울 곳이 없자 자신의 방은 필요 없다며 허물어버리고는, 도방의 무사들과 [[숙식]]을 함께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178년]], 청주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 원래 [[청주]] 주민으로 수도 [[개경]]에 호적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이동한 사람들과 청주 토착민들 사이에 심한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격한 몸싸움으로 번져 100여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청주의 사심관으로서 대장군 박순필과 함께 파견되어 있던 경대승은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